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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담의 투쟁 배경

1998년 11월 21일

제목을 달아놓고 보니 좀 이상하다. 왜냐하면, 어떻게보면 지금부터 내가 떠들 이야기는 ‘건담의 투쟁배경’이라기보다는 ‘지온공국의 투쟁배경’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왜 우주인과 지구인이 피터지게 싸워야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지금부터 하고자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동전사 건담>에서 아무로의 고민이며, <기동전사 Z건담>에서 카미유의 고민이기도 하다. 건담은 고민하지 않는다. 로봇이니까.

조금 다른 시각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보자.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로봇만화에서의 적군이란, 마징가 제트에서처럼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야망에 불타는 정신나간 과학자 또는 군인이거나, 지구를 지배하기 위해 먼 외계에서 땀 뻘뻘흘려가며 날아온 우주인들이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즉, 대부분의 아군들은 우리의 고향인 지구를 지킨다는 사명감으로 적들과 싸웠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온공국은 지구를 지배하기 위해서 전쟁을 벌인 것인가? 천만에 말씀이다. 지온공국은 지구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하고 그 독립을 지키기 위해 연방과 싸우는 것이다.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건담은 지구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게 아니라 지온공국을 멸망시키기 위해 싸운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 어떤 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싸우는 아군이란 설정은 그때까지의 로봇만화 계보에서 어긋나는 설정임은 틀림없다.

물론 제작자들도 심한 모험을 하지는 않았다. 지온공국은 지구의 일부를 점령하였으며, 실질적인 선전포고가 되었던 콜로니 낙하로 지구 거주자 대부분을 몰살시켜버렸다. 지온공국의 존재가 지구연방의 안위에 커다란 위협이 되고 있음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이다. 그러나 지온공국이 적어도 지구라는 행성 자체에 욕심이 없었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지온공국이 지구의 일부에 주둔한 것은 전쟁에서 필요하나 우주에는 부족한 물자를 얻기위함이었을 뿐이다. 다만 콜로니를 떨어뜨려 지구에 핵겨울을 일으키려는 시도가 계속 이어지는 것은, 아무리 건담의 열광적인 팬들이 건담 시리즈를 선과 악의 구별이 없는 대표적인 만화로 손꼽고 있다해도 제작자들이 분명히 선과 악의 구분을 짓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럼 지온공국은 왜 독립하려고 하는가? 거기에 대해서는 극중에서 샤아가 말많이 했다. 지온의 이상… 샤아의 아버지인 지온의 이상이란 무엇인가? 스토리 설정상 그것은 지구에서 소외받고 강제이주에 가깝게 우주로 내몰린 스페이스노이드들의 자존심 회복이라는 정신적 가치와 생존권 보장이라는 물질적 가치를 모두 지향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프롤레타리아, 민중의 봉기였다. 돈없고 빽없어 불투명한 세계인 우주로 내쫓겨난 우주이민들은 뼈빠지게 일해서 살만해지니까 연방으로부터 군사적 탄압을 받고 지구와 콜로니간 불균형 무역으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에 야마가 돌아버린 스페이스노이드들이 혁명을 외쳤다. 자신들을 탄압하는 지구에 콜로니를 떨어뜨려 핵겨울을 일으키고, 새로운 세계인 우주가 중심이 되는 세상을 꿈꾼 것이다. 그러자 건담을 앞세운 연방군은 그들을 탄압했다.

앞서 말했지만 제작진들은 이렇게 멋진 설정을 해놓고도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한 반발심 때문인지 지온공국을 결국 독재로 흐르게하고 (사회주의가 독재화된다는 공식에 충실한 모양이다) 나중에는 이상주의자인 샤아마저 복수의 화신처럼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혁명 – 더 나아가 전쟁 자체에 회의를 일으키게 하는 복선을 삽입시켜 <기동전사 건담>을 마치 평화를 외치는 반전영화처럼 꾸며놓았다. (솔로몬전투를 보면 이 느낌이 강하게 와닿는다. 밀라이와 헤어져 장렬하게 전사하는 스렛가와, 어린 딸을 떠나보내고 홀로 솔로몬을 지키다가 건담에게 두조각나는 도즐. 이 두사람의 죽음을 보면서 나는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않는 똑같은 아픔을 느꼈다)

민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스페이스노이드의 독립은 그후 시리즈를 거듭하면서 계속 이상으로만 남아있다. 건담의 파일럿이었던 아무로는 우주에서 자랐지만 아버지가 연방군 소속이었기 때문에 진정한 민중이라고 말하기는 좀 거리가 있었고, 역시 부모가 연방군 소속이었지만 연방군의 손에 어머니를, 스페이스노이드의 손에 아버지를 잃은 카미유는 민중의식보다는 운명적으로 전쟁에 휩쓸려들어갔다. 질이 뚝 떨어지는 ZZ건담의 파일럿 쥬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그때껏 건담시리즈가 갖고있던 무게를 한순간에 날려버린 괘씸한 캐릭터다) 이처럼 건담의 주인공들은 이렇게 첨예한 민중의식과 보수세력간의 싸움 속에서도 아무도 전쟁의 배경인 스페이스노이드의 이상에 대해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 주관이 뚜렷한 인물은 샤아 한 사람뿐이다.(그래서 아직껏 샤아가 가장 사랑을 많이 받는 캐릭터로 꼽히는지도 모른다)

건담 제작진이 무얼 말하고 싶어했건, 건담 스토리에 담겨있는 내용들은 무척 심오하다. 그 속에서 별 의식도 없이 헤매이는 캐릭터들이 아쉽긴 하지만, <기동전사 Z건담>에서 고압적인 연방군 캐릭터들과 스페이스노이드의 이상을 위해 싸우는 에우고 대원들의 설정은 나무랄데 없다. 티탄즈를 물리친 에우고가 왜 연방에 편입되버렸는지는 생각할수록 열받는 일이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