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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학생시절] 동창회장배 설계경기

1997년 12월 20일

건축과는 가끔 이상한 과제를 주고 사람들 머리 썩이게 하는 경우가 많은데, 과에서 전통처럼 오래 내려오는 골아픈 과제 중에 골판지(일명 박스종이)로 의자를 1:1 비율로 만드는 게 있다. 골판지라는 측면에 약하고 수직에 강한 재료를 어떻게 활용해서 사람이 실제로 앉을 수 있는 의자를 안전하게, 또한 이쁘게 만들어내느냐는 점이 관건인, 다시 말해서 재료학, 역학, 시공학, 디자인까지 한꺼번에 이 과제 하나로 테스트하겠다 이거다. 뭐 힘없는 학생인 관계로 개길 수도 없어 친구 노 모군과 팀을 이뤄서 의자 하나를 만들었다. (노 모군이 미팅이 있다며 저녁쯤 날라버린 관계로 마무리를 나 혼자 짓다가 부실공사가 되버렸다… 으…) 그런데 우리가 의자를 만들고 있을 때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면서 전부다 이쁘다, 괜찮다 찬사를 보내는 것이었다. 오잉 조짐이 이상하다? 이번 의자만들기는 동창회 주최 행사의 일환이었기 때문에 동창회에서 좋은 작품을 뽑아 상도 준다. 거렇다면 혹시 상을 받을 수도…?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와 비슷한 컨셉에 비슷한 모양인 김 모군 김 모양 팀의 의자가 “맵시상”을 받았다. (우리 의자는 개념도 별루고, 구조적으로나 시공적으로나 부실공사여서 “개념상” “구조상” “시공상”은 꿈도 못꾸고 오직 “맵시상”만을 노릴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인기상”이 남아있었다. 일단 “장려상”(상품은 도서상품권)은 받았으므로 우리 의자는 교내에 전시되었고, 그 장려상 수상작들 중에 투표를 해서 인기상을 뽑는다는 거였다. “인기상”의 상품은 전자수첩!!! 오옷!! 이건 질적으로 다르다!! 그런데 울 학교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만, 전시기간 중에 투표가 제대로 되지 않아 시상식에 앞서 즉석 투표를 하는 걸로 변경이 되었다. 시상식이라고 학부생 전원(안온 놈들도 많으니 전원은 아니겠지만)을 죽 앉혀놓은 상태에서 장려상 수상작들을 하나씩 거수 투표로 받았다. 옷!!! 우리 의자가 예선 공동 1위로 본선에 올랐다!!! 게다가 본선 투표에서는 단독 1위를 차지한 것이었다!! 결선에 남은 세 작품을 두고 마지막 거수 투표가 행해지기 직전, 신 모 교수님이 결선이니까 제작자들이 나와서 작품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하라고 하셨다. 그리하여 첫번째로 동기 김 모군이 (김 모는 워낙 많으므로 여태 내가 언급한 김 모군은 거의 다른 사람들이다) 나가서 설명을 시작했는데, 이 인간이 워낙 괴짜다보니 적절치못한 유머와 시의부적절한 농담으로 설명을 요상하게 마쳐버렸다. 어 그런데 오히려 분위기가 좋아졌다. 어차피 인기상이니까 주목만 끌면 되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그 분위기를 파악했는지 두번째로 설명을 하러 나간 후배 변 모양(음… 이 김 모군과 변 모양이 후일 CC가 되었군…)은, 자신이 만든 의자에 턱 앉아서 샤론 스톤처럼 다리를 꼬고앉아 개념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시상식장은 열광의 도가니탕이 되고 말았다. 이 분위기를 뒤엎을 방법은 없을 것 같았다. 으… 예선 본선에서 죽 1위를 달려오다가 샤론 스톤의 막판 뒤집기로 패배하고 마는 것인가. 신 모 교수님마저도 변 스톤 양의 섹시한 설명 잘 들었다며 그 분위기를 이어주고 있었다. 교수님까지 외면하다니… 마지막으로 우리 차례가 돌아오자 노 모군이 앞으로 나갔다. 노 모군은 진주 출신으로 심한 경상도 사투리의 소유자이며, 우리가 만든 의자의 기본 개념은 “격자”였다.

“저희가 만든 의자의 기본 개념은 객자입니다”

샤론 스톤이 어렵게 조성해놓았던 분위기는 이 말 한 방으로 역전되었다. 시상식장은 뒤집어졌고 교수님들도 신나게 웃어제끼고 계셨다. 투표 결과 우리 의자가 과반수 가까운 지지로 1위에 뽑혔고, 상품으로 전자수첩을 받아내고 말았다. 히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