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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트 노아와 박사님

2003년 4월 25일

흘러간 슈퍼로봇물을 가만히 돌이켜보면, 우리의 자랑스러운 주인공로봇과 그 로봇을 조종하는 용감한 주인공과 함께 반드시 등장해야만하는(?) 존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주인공의 여자친구? …뭐 그럴 수도 있겠지만, 본인이 말하려는 사람은 주로 박사님,이라는 식으로 불리우던 바로 그 사람이다. 대충 감이 오시는가?

없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슈퍼로봇물을 보면 박사님은 거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존재하고 있음을 금방 알 수 있다. 일단 로봇을 누구든 만들었어야 되지 않겠나. 물론 갑자기 우주에서 떨어졌거나, 지하에서 솟아났거나, 시공간을 초월해서 나타났거나 하는 이유로 굳이 누군가가 만들지 않았어도 저절로 나타난 로봇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거의 예외없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르지만 무슨무슨 박사라는 사람들이 나타나 주인공을 제어하고 지휘하고… 그랬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바로 그 박사님이 극 중에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란, 주인공로봇을 만들었거나 아니면 만든 사람과 절친한 사이거나 하는 것은 그저 구실일 뿐이고, 적이 쳐들어왔을 때 주인공(로봇+조종사)을 출동시키는 그야말로 중차대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는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그들이 했던 구체적인 일이라는 건 마이크에 대고 ‘누구야 정신차려라~’라는 식의 고함이나 질러대는 것이 다이긴 했었다) 대부분 소년/청소년-하여튼 미성년자였던 주인공의 후견인으로서, 로봇이 고장나면 고쳐주기도 하고, 지구를 지킨다는 이유로 높은 사람들 만나서 후까나 잡고, 뭐 그런 역할을 수행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인물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박사님들을 곰곰이 따져보면, 극 중에서 주인공이 직접 싸울 때야 한없이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줄 따름이지만, 사실은 엄청나게 전지적인 능력을 갖고있는 사람들이기 일쑤였다. 일단 외계인(또는 기타 다른 적)의 지구침략을 미리 간파해내고 적들을 한번에 당해낼 수 있는 슈퍼로봇을 만들어냈다는 것 자체가 그렇고, 만들지 않고 저절로 솟아난 로봇을 그냥 줏어왔다고 해도 자기가 직접 만들지도 않은 그 로봇이 고장나면 척척 고쳐주고, 그 로봇을 조종할 조종사를 어디서 발굴해냈건 훈련을 시켰건, 하여튼 쌈빡한 녀석으로 키워내는 능력까지 갖추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간혹 그 전지적인 능력이 주인공도 모르는 비밀무기를 로봇에 숨겨놨다가 굳이 주인공이 위기에 몰렸을 때에서야 급하게 알려주는 변태스러움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왕왕 있었지만, 어쨌거나 이 박사님들의 능력이 슈퍼로봇만큼이나 슈퍼스러웠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쯤 설명해놓고 <퍼스트 건담>을 돌이켜보자. 유감스럽게도 <퍼스트 건담>에서는 박사님이라는 존재가 없다. 건담을 만든 – 정확히 말하자면 제작진의 일원이라고 봐야 하지만 – 뎀 레이 박사는 1화에 잠깐 나왔다 말뿐이고, 그 후 건담을 통제하고 아무로를 통제하는 사람, 즉 실질적인 의미에서 박사님의 역할을 대체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화이트베이스의 임시함장, 브라이트 노아였다. 다시 말하면, 건담이 밀리터리물을 지향하게 되면서 슈퍼로봇물과 가장 많이 달라진 부분 중의 하나로 “로봇-조종사에 대한 통제가 박사-개발자에서 군인-상급자로 넘어왔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보니 그 역할이 과거의 박사님들에 비하면 엄청나게 축소되어있다는 점에도 주목하게 된다. 브라이트 노아는 지온공국의 역습을 예상하고 있지도 않았고, 아무로를 뉴타입으로 각성시켜주지도 못했고, 건담에 숨겨진 비밀무기는 커녕 건담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로보다 한참 모르는, 그야말로 순수한 지휘관일 뿐이었다는 말이다. (게다가 그 지휘관이라는 것도 갑자기 들이닥친 상황에서 어영부영 떠맡은 셈이 아닌가) 자아, 적의 동향을 정확히 파악한 후 자신을 통제하고 건담을 통제해서 효과적으로 적과 맞서싸우게 해줘야할 지휘관이 이러하니, 아무로의 처지 또한 각박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주인공들은 박사님이 비밀무기도 만들어주고 적의 약점도 파악해주고 그랬는데, 아무로는 거의 혼자 화이트베이스의 운명을 짊어지다시피 하고 자기가 공부하고 연구해가면서 적과 싸우는 처지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박사님들의 전지전능한 능력 일부를 주인공인 아무로에게 물려준 판국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의문을 가져보자. 브라이트는 왜 그렇게 무기력하게 그려졌는가? (물론 절대적인 기준에서 보면 브라이트가 무기력한 존재는 아니다. 과거의 박사님들에 비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것이 단순히 개발자에서 상급군인으로 역할이 바뀌었기 때문일까? 그것보다 본인은 주인공 캐릭터의 변화에서 답을 얻으려 한다. 예전의 주인공들에 비하면 사명감도, 희생정신도 많이 부족한 편인 – 다르게 표현하면 예전의 주인공들에 비하면 상당히 인간적인 아무로에게는 브라이트처럼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지휘관이 더 어울렸던 것이다. 브라이트의 부족함(지휘관으로서의 부족함이 아닌 박사님으로서의 부족함)은 상대적으로 아무로의 인간적인 면을 돋보이게 하고, 극 중간에서 아군끼리 주먹질까지 하게 만드는 그런 전장의 리얼함을 추구하는데 충분한 역할을 해줬다고 생각되며, 그것이 바로 슈퍼로봇에서 리얼로봇으로 가는 작은 밑거름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