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미야자키를 좋아하십니까?

2003년 4월 24일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해서 본인은 쓰잘데기없는 자부심을 하나 가지고 있다. <마징가 제트>가 우리나라 만화라고 굳게 믿었던 사람이 더 많았을지도 모를 80년대 후반에, 미야자키 하야오의 주옥같은 애니메이션들을 (자막없는 비짜 비디오였지만) 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고등학생이었던 당시, 우리 학교에 일명 ‘쪽바리’로 불리던 일본문화의 첨병들이 몇몇 있었기 때문에, 처음엔 나 혼자 좋아하던 <건담>에 관한 소스를 얻으려고 걔네들과 친해졌다가 <건담0080>을 시작으로 <토토로> <마녀택급편> <나우시카> 같은 애니메이션들을 줄줄이 보고, 나중에는 쿠도오 시즈카나 라우드니스 같은 J-Pop까지 섭렵하고 말았으니.

하긴 뭐 그 당시에 나온 미야자키의 애니메이션이라고 해봤자 손으로 꼽을 정도긴 하다. <붉은 돼지>도 나오기 전이었으니까… 하지만 <나우시카>나 <토토로> 등이, 많은 사람들이 명작으로 꼽고있는 작품들임은 분명하지 않은가? 아뭏든 그때 접했던 그 애니메이션들에 의해 내 인생의 방향이 많이 틀어졌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그건 잘 모르겠고…

각설하고, 그 후로 남들은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다는 쓰잘데기 없는 자부심을 매개로 하여 미야자키의 애니메이션이라면 나름대로 챙겨보는 편이 되었다. 남들에게 추천해주면서 잘난 척도 좀 하고… 하지만 개나 소나 모두 미야자키를 알게 된 이후로는 그런 관심도 많이 떨어지고 말았다. <모노노케히메>가 개봉했을 때도 그랬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개봉했을 때도 그랬다. 특히나 미야자키의 애니메이션에서 느낄 수 있었던 어떤 특별함, 그런 것이 <모노노케히메>에서 많이 깎여나간 것을 발견한 뒤로는 <센과 치히로…>에 대해서 더욱 시큰둥해질 수밖에 없었고, 나중에는 <센과 치히로…>가 베를린영화제에서 금곰상을 받았다는 말에 코웃음을 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어쨌거나 베를린영화제 금곰상에 빛나는 <센과 치히로…>가 그 여세를 몰아 국내에 개봉되었을 때, 사촌동생이 옆에서 심심하다구 뒹굴뒹굴하고 있지 않았다면 굳이 극장으로 행차하지도 않았을 게다. 이렇듯 워낙이 시큰둥한 상태에서 본 영화라 그런지 몰라도 <센과 치히로…>는 과거 미야자키의 전작들, 그것도 화질 나쁜 비짜 비디오에 대사도 못알아듣고 보던 그 작품들이 주던 감동에 한참 못미치고 말았다. 게다가 나의 쓰잘데기없는 자부심이 거기에 겹쳐져, 영화 보는 내내 (미야자키의 영화는 극장에서 처음 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 저건 뭐랑 비슷하네. 저건 뭐랑 비슷하네…”

그런데 이 점은 굳이 내가 비딱해서만도 아닌 것이, 미야자키를 처음 접한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이웃의 토토로>에 나왔던 그 검뎅이 도깨비들을 어찌 잊을 수 있겠으며, 토토로처럼 갈구리 손에 큰 덩치를 가진 뚱뚱한 털보 귀신을 보며 어찌 감탄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난데없는 강의 신이 나와 환경문제를 온몸으로 역설할 때(정말, 온몸으로 역설하지 않았나?) 어찌 나우시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억지 써보자. 부모가 돼지가 되는 장면에서 혹시 포르코 룻소를 떠올리신 분은 없는가…? 없나보다) 미야자키 영화팬이라면 좀 과장되게 표현해서 신물이 나는, 그 놈의 여자주인공, 하늘을 날고, 자연과 동화되고… 무엇 하나 새삼스러운 게 있었어야 말이지.

요약하자면 영화를 본 내 느낌은 이랬다. “미야자키 은퇴를 기념하는 다이제스트판”. 뭐 실제로 은퇴할지 안할지는 모르지만 지 말로 이제 연출 안한다니까. 어쨌든 다이제스트판이라는 것이 나쁘다는 말은 아니고, 그동안 미야자키의 영화들을 죽 봐온 입장에서 “특별히 재밌지도” “특별히 새롭지도” “특별히 와닿지도” 않았다는 말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래도 그동안 컴퓨터나 비디오로만 보아오던 미야자키의 작품을 극장에서 널찍한 스크린으로 본 것, 그것 하나는 나쁘지 않았으니까 뭐 본전 생각은 안나더라.

PS. 제목에 대한 작은 딴지. 영어제목도 뭐 그렇게 나오긴 했지만,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과연 “센과 치히로” 두 명의 행방불명이라는 의미일까? 나는 이게 자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라는 의미로 생각되는데 내가 특이해서 그런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