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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리] 영화는 볼거리다

2000년 1월 10일

성격이 워낙 이상하다보니, 남들이 다 보고 안보면 왕따되는 영화는 또 죽어라고 안보는 묘한 경향이 있다. <사랑과 영혼>이 그랬고, <타이타닉>이 그랬으며, <쉬리>도 마찬가지였다.

극장에서 연일 신기록 행진을 하고 있던 <쉬리>를, 나는 마치 저런 유행에 휩쓸리지 않아야만 되는 것처럼 수수방관만 하고 있었다. 늘 그렇지만 히트치는 영화라는 것은 굳이 극장가서 찾아보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줄거리나 명장면, 대사들이 세상을 뭉게뭉게 떠돌게 마련이다. 그리고 비디오도 출시되기 마련이고.

그런데 굳이 돈주고 비디오가게에서 빌려볼 필요도 없이 올해 첫날, 케이비에쑤가 거금을 들여 <쉬리>를 방영했다. 아버지 어머니도 익히 이름을 들어 아는 영화가 <쉬리>였기에 내가 굳이 보자고 하지 않았어도 집에서는 자연스럽게 <쉬리>를 보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기본적으로 <쉬리>를 보고난 느낌은, 저런 영화에 왜 그렇게 많은 찬사가 쏟아졌는지 열이 확 받았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단지 흥행에 성공했기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쏟아진 것이 틀림없는 그 찬사들을 싹 빼내면, 제법 재밌게 만들어낸 액션영화라는 점에서 점수를 줄 수는 있겠다. 그러나 어떻게 <쉬리>가 “20세기 최고의 한국영화”라는 둥 “가장 영화다운 영화”라는 둥 “한국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라는 둥의 칭찬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지껄이는 인간들 다 때려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다. (너무 많아서 때려죽일라면 힘이 좀 들 거는 같다)

기분이 꼬와서 좋은 얘기 한마디도 못해주겠다. 기본적으로 액션영화라는 측면에서도 사실 좋은 점수 못주겠다. 무슨 비디오 평가하는 곳에서 쉬리에게 별 네개 줬다. 나는 세개, 후하게 줘도 세개 반밖에 못주겠다. 나는 기본적으로 액션영화에는 점수가 짜기 때문에 세개라면 잘 준 셈이다.

단지 칭찬을 많이 받았으니 칭찬 못해주겠다면 내가 나쁜 놈이 되고 말테니까 이제부턴 조목조목 얘기해봐야겠다. 첫째로 액션이 너무 많고 길다! 시작하고 처음 몇 분간 북한군의 훈련 장면은 괜찮다. 오바하는 느낌이 들지만 그거는 감독의 표현방식이니까 상관없다. 한석규가 이방희에게 저격당하는 꿈을 꾸는 장면까지도 괜찮다. 그런데 최민식이 지휘하는 특수부대가 남파되면서 액션이 지루해진다. 액체폭탄을 빼앗기 위해 벌어지는 액션은 좁은 앵글에서 너무 지루하게 찍었다. 봉고는 왜 폭발시키는지 전혀 이해 못하겠다. 한석규의 함정에 걸려들어 최민식이 쫓기는 장면, 이방희가 나타나서 구해줄 때까지의 그 액션은 건물에서, 시가지에서, 지하도로 이어지면서 (편집에서 상당부분 잘렸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너무 길다. 총소리만 방방 거리고 솔직히 나중엔 짜증났다. 송강호가 죽는 장면은 어딘가 어거지로 끼워맞춘듯 괜히 덜거덕거리는 느낌이고, 마지막 잠실구장 변전실에서의 싸움과 이방희의 최후도… 미안하지만 지루하다.

왜 이렇게 됐을까를 찝어내는 건 간단하다. 강제규 감독은 액션영화라는 장르가 제대로 개척되지 않은 한국에서 제대로 된 액션영화를 찍어보고 싶었던 거고, <쉬리>라는 영화에 자신이 찍어보고 싶었던 액션 장면을 나의 표현대로라면 무리하게 쑤셔넣었던 거다. 액션영화란 어차피 그림이므로, 강제규 감독의 머리 속에 그려놓은 그림들을 화려하게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그런 이유로 액션영화들은 스토리가 탄탄하지 못하다. 그런데 강제규 감독이 시나리오도 많이 써봤다면서, 그것도 팀작업으로 몇년을 <쉬리> 시나리오를 썼다면서, 탄탄하고 개연성있는 스토리 텔링보다 (스토리가 아니고 스토리 텔링이다. 그 차이점이라는 건 순전히 내 개인의 개념일지도 모르지만) 화려한 액션을 효과적으로 짜맞추는데 중점을 두지 않았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쉬리>는 멋진 액션장면을 보여주기 위해 스토리가 존재하는 느낌이다. 주인공들을 한번 대치시켜보기 위해 함정도 한번 파보고, 차가 폭파하면서 주인공이 점프하는 장면도 한번 찍어보게 봉고도 터뜨려보고, 건물이 폭파하면서 사람들이 마구 대피하는 스펙타클한 장면도 등장하고 미니어쳐 건물도 한번 써먹어보게 백화점도 폭파시켜보고, 주방에서 야채들 퍽퍽 터지고 수도 폭발하고 하는 장면도 써먹어보고, (그렇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주방 액션의 최고봉은 “마누라 죽이기”라고 생각한다) 이방희가 수족관을 하니까 수조도 한번 다 깨보고, 하여튼 한국액션영화에서 써먹어볼 수 있는 모든 방법은 다 써먹어본 실험대 같다 꼭. 그러니까 간단한 스토리에 러닝타임만 늘어진게 아닌가.

두번째로 액션영화라고 하지만 아직도 “한국의…”라는 단서를 붙여줘야될 정도로 진부한 면이 있다. 이방희의 ‘조국과 사랑’. 참신할 것도 없는 것이 여자가 액션영화에 나오기만 하면 거의 필수적으로 나오는 방정식이다. 한국적 액션이기 때문에 남북문제를 다룬 것은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아니 당연하기도 하겠다 싶지만 아직도 “배달의 기수”류의 반공논리를 갖고 있는 것 같아 짜증난다. 북한은 자기네 지도자를 없애버리려고 할 정도로 적화야욕에 불타고 있다는 논리를 주입시키려고 하다니… 액션도 총맞은 사람들이 합기도 유단자들처럼 재주를 넘으며 쓰러지는 꼬락서니를 보니, 정말 한국적 액션이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전쟁터에서 총맞으면 사람들이 다 그렇게 재주를 넘나?

뭔가 보여주고 싶은 게 많았던 영화. 그리고 적어도 보여주고 싶었던 건 다 보여준 영화가 <쉬리>가 아닌가 싶다. 대개 보여주고 싶었던 거를 절반도 못보여주거나, 그나마 보여준 것도 오해되기 십상인 한국영화판에서, 화끈하고 돈쳐바른 액션이라는 것을 제대로 보여준 영화. 어차피 영화는 볼거리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를 보고 열광한 사람들을 바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흥분해도 말은 가려서 해라. 어떻게 이런 영화가 헐리웃 영화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영화가 될 수 있나? 돈을 훨씬 적게 들이고 이만큼이면 성공 아니냐고? 돈을 <쉬리>보다도 적게 들이고 훨씬 재밌게 만든 외국 영화들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