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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 – 촉한의 띨띨이

2000년 12월 16일



유선

촉한(蜀漢)의 후주(後主). 유비의 오직 하나인 아들. 자는 공사(公嗣). 인간이 암약하여 17세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뒤, 제갈양의 생존 중에는 가끔 실수는 있었다 해도 그래도 무난하더니 장완, 비위가 연이어 세상을 떠난 뒤로는 환관 황호의 손에 농락되어 궁정이 날로 말이 아니었다. 재위 32년, 위에 항복한 뒤 안락공으로 봉하여졌고, 낙양으로 옮겨가 거기서 천수를 다하였다.

촉한의 영원한 띨띨이…

삼국지를 유비의 편에 서서 촉한의 부흥을 응원하며 읽어온 사람이라면, 관우 장비 유비가 차례로 죽어나간 뒤에 쉽게 말해서 우리편 대빵이 된 유선에 대해 열불터져본 경험이 누구라도 있을 것이다. 마치 우리편(=촉한)이 중국을 통일하지 못한 이유는 순전히 유선이 못나서인 것으로 치부하며 말이다. 어떤 시각으로는 유선의 띨띨함은 곧 유비의 띨띨함을 물려받은 탓이라고도 하는데, “유현덕마냥 울기만 하느냐”는 속담이 전해지듯 어떤 면에서는 무능한 군주의 표상일 수도 있는 유비의 자식이라는 점에서 보면 유선도 그다지 유능한 군주가 될 싹도 없었을 법도 하다. 그나마 밑바닥 저자거리에서 살아오며 의리와 협기로 무장되었고 민초들의 삶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고 있다는 유비 나름의 장점을 물려받기에도 환경적으로 갖춰지지 못했으니 유선이 유비보다 더욱 띨띨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겠다. 항간에는 당양파에서 조자룡이 그를 목숨을 걸고 구해냈으나 유비가 땅바닥에 내던지는 바람에 머리를 다쳐서 띨띨하다는 설도 있는 것으로 알지만.

그렇게 띨띨했나?

자, 유선을 옹호하기 위해 아주 색다른 시각에서 접근을 해보겠다. 유비라는 용(龍)이(조조의 표현을 빌면 유비는 용이다) 미꾸라지만도 못한 유선을 어떻게 낳을 수 있었는가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워낙 유비는 코에이의 삼국지 게임에서도 나타나듯 지력도 별로, 무력도 별로, 그저 매력만 무지무지 높은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그나마의 장점을 잘 살린 덕분인지 삼국지의 전반부에서는 유비도 나름대로 삼국지의 흐름을 이끌어가는 주인공 중 하나였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서 유비라는 이름이 찾아보기 힘들어지는데, 바로 제갈양이 등장하면서부터다.

제갈양의 등장 이후 유비의 행보를 살펴보면 제갈양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딱 한번 제갈양의 뜻을 거스르고 동오를 쳤다가 자신의 명줄만 줄여놓았으니 제갈양을 거역(?)한다는 것이 바람직한 일은 아니겠지만, 전반부에 유비가 갖고있던 영웅적 이미지가 제갈양을 휘하에 들인 이후 많이 퇴색하고 있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사실상 후반부에는 조조도 주유도 제갈양의 영웅적 활약을 보조하기 위한 보조적 인물일 따름임을 상기시켜본다면, 유비 정도가 어디 쨉이나 되겠는가?

하물며 유선은 어떻겠는가. 유선이 유비보다 아주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다한들 제갈양에 미치지는 못했을텐데 유비보다 그다지 나은 인물도 아니었다. 앞서 말했지만 유비처럼 의협생활을 겪은 것도 아니요 민초들의 삶을 살아온 것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자신에게는 자신보다 촉한을 훨씬 잘 이끌어갈 수 있는 희대의 인물 제갈양이 있었다. 자신이 어떤 생각이 있고 신념이 있더라도 “완벽한 조언자” 제갈양에게 의지하는 것이 훨씬 나라를 꾸려가는데 효과적이고 간편한 방법이라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할 바보는 아니었던 것이 아닐까? 아니, 의지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맡겨버리고 자신은 탱자탱자 놀아버려도 “중국 역사상 최고의 재상” 제갈양이 쪼만한 촉한 하나 어떻게 못할 인물도 아니었다. 역으로 생각해보자. 만약 유선이 정말 띨띨한 인물이어서 제갈양을 짤라버리고 자기 맘대로 나라를 주무르고자 했다면 과연 삼국지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다행히 유선은 그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다만 유선의 띨띨함은 상대적으로 제갈양이란 뛰어난 재상의 능력과 비교되어 더욱 빛을 발했을 따름이지, 유선은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자신과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인지 알고있었기에 (멀리 내다보지 못했다는 점은 아쉽지만) 자신이 나라를 어찌어찌 하겠다는 것보다는 먹고마시며 세월을 탕진했던 것이다.

그럼 제갈양이 죽은 이후는…

앞서 제갈양이 죽은 이후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제갈양이 후계자의 교통정리를 해놓지 못한 것은 제갈양의 최대실수라는 점을 언급한 바 있다. 그 영향은 유선에게도 그대로 미쳐서, 이미 국정은 중신들에게 맡기고 놀고먹는데 이골이 난 군주에게 제갈양이 죽었으니 새삼 스스로 나서서 올바른 국가의 기강 어쩌구는 소귀에 경읽기일 따름이었다. 조조가 사마의의 재주를 알아봤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를 중용하지 않았다는 대목을 보면, 유비에게 그런 결단을 기대할 수 없었던 상황을 탓해야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