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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생기면 아군, 못생기면 적군

1998년 9월 3일

먼저 마징가 제트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뭐, 마징가를 비롯한 대부분의 로봇 만화들에서 사실 아군이라고는 구색 맞추기 위한 여자 로봇 정도나 있을까 대개 혼자 싸우고 있지만, 일단 주인공 및 그에 준하는 로봇 캐릭터들은 준수하게 생긴 것이 사실이다. 그에 반하여 적군에서 만들어 보내오는 로봇들은 오징어처럼 많은 다리를 갖고 있거나, 곤충을 닮았거나, 물고기를 닮았거나, 반인반수, 지나치게 떡 벌어진 어깨 등 괴물에 가까운 모습들을 하고 있다. (말하기가 좀 그렇지만, 마징가나 그레이트 마징가에서 파트너로 등장하는 아프로다이나 비너스 에이스는 탱탱한 유방을 갖고 있지만 적군에서 가끔 등장하는 여성 로봇들은 하나같이 늘어진 유방(?)을 갖고 있다는 점도 추가한다)

건담의 초창기 모습은 대충 그런 스타일이었다. 지온의 모빌슈트들이 울퉁불퉁한 파워 케이블과 강단있어 보이는 팔다리, 위압감을 주는 짙은 도장과 무엇보다도 애꾸눈이라는 점에 비해, 건담은 흰 색에 두 눈을 다 갖고 있고, 목도 없는 자쿠나 릭 돔 등에 비해 훤칠하고 날렵해보이는 체구를 갖고 있었다. 나중에 지온에서 모빌아마라는 이름으로 괴물에 가까운 로봇들이 등장했지만 연방군(아군?)의 모빌아마인 볼은 나름대로 귀엽게 보이는 모습일 정도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잘생기면 아군이고 못생기면 적군”이라는 정형은 건담 시리즈에서 파괴되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제타 건담의 첫장면에서 등장하는 릭 디아스는 어느 모로보나 과거 자쿠나 릭 돔 같은 지온의 모빌슈트를 연상시켰다. 게다가 세 대의 모빌슈트가 싸이드 7로 잠입하는 모습은 명백히 건담 첫 장면의 재판이었다. 그렇다면 저놈들은 나쁜 놈?? 하지만 공교롭게도, 제작이 완성된 건담을 둘러보는 과거의 지온군인을 연상시키는 놈들이 아군이고, 시커먼 모습으로 누워있는 건담이 나쁜 놈이었다. 여기서부터 파격이 시작되었다.

물론 건담은 아군인 에우고에게 탈취되고 제타 건담과 백식같은 미려한 형태의 로봇들이 차례차례 아군인 에우고의 주력 모빌슈트로 등장하지만, 아무리 봐도 정이 안가는 모습의 릭 디아스는 끝까지 에우고의 주력 모델로 활약했다. 물론 이것은 전편에서와 아군과 적군의 개념이 바뀐 탓에 오는 혼란이지만, 일단은 파격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이게 전부다. 기껏 잡아내자면 묘하게 생긴 메터스 정도가 릭 디아스와 같은 성격을 갖고 있는 정도고 에우고의 일반형 모빌슈트 네모는 과거 GM의 형태를 따르기 시작했다. 반면 연방군은 구 지온군에서나 써먹을 듯한 하이잭, 갈발디, 마라사이 등을 줄곧 선보였고, 제타 건담과 맞서기 위해 내놓은 싸이코 건담 시리즈는 건담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별로 이쁘게 생겨먹지는 않았다. 건담 마크 투나 제타 건담과는 비교도 안되는 덩치에다가 얼굴도 지온 스타일로 변형되었고(눈만 두 개다) 색깔도 티탄즈의 건담 마크 투처럼 시커멓다. 제타 건담의 마지막 숙적 지오(정확히 말하면 디오지만, 일본어로 변형되었기 때문에 지오라고 한다)는 고철덩어리처럼 생겨먹은게 깔끔한 스타일의 시로코가 마지막으로 만든 모빌슈트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다. 더군다나 막판이 되면 허리가 없는 바잠이 나오질 않나, 지온의 정통을 잇는다는 액시즈의 가쟈 시리즈는 기존의 모빌슈트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내가 말하고 싶었던 요점은 이런 것이다. 제타 건담이 발표될 때 지온과 연방군의 모빌슈트가 뒤섞여버린 것은 스토리상 필요하기도 했겠지만 전작 건담에서 멋지게 생긴 샤아의 붉은 자쿠, 강한 남자 란바랄의 그프 등의 캐릭터가 건담 못지않은 인기를 끈 것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이미 건담 시리즈를 즐겨보는 팬들은 자쿠 스타일, 지온 스타일에 구애받지 않게 되었고, 미려한 건담 스타일보다 강한 인상의 캐릭터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다수를 이루게 되었으므로 제작자들은 그 취향에 발맞춰나간 것이다. 사실, <건담 0083>에서도 지온에게 탈취당하는 건담 2호기만 싸이코 건담처럼 생겼다는 것은 아직도 아군은 이쁜놈, 적군은 못생긴 놈이라는 공식이 발휘되고 있다는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