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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양의 라이벌(1) – 주유

2003년 7월 21일



주유

오의 장수. 여강서성 사람으로 자는 공근(公瑾). 손책과 같은 나이로, 어렸을 때부터 그와 둘도 없는 친구였고, 교공의 두 딸을 나눠 얻으니 동서 간이기도 하다. 또 손책이 부친 손견을 잃은 뒤부터는 장소와 함께 손책을 보좌하여 오나라의 기초를 공고히 했다. 손책이 죽고 19세의 손권이 뒤를 이었을 때, 그는 장소, 정보 등 문무관과 함께 손권을 보좌했다. 손책이나 오태부인 모두 유언에서 군사에 관해서는 공근에게 물으라던 유능하고 신임받던 장수다. 조조가 형주를 공략하고 남하했을 때는, 조조와의 강화를 주장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은 가운데 노숙과 함께 단호히 싸울 것을 주장하고 필승의 이유를 들어 손권으로 하여금 싸움에 나서도록 했다. 적벽싸움에서 대승을 거둔 후 남군태수가 되었다. 그는 익주의 유장이 한중의 장노 공격에 고심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익주를 쳐서 장노를 평정하고 이어서 마초와 동맹하여 조조를 멸할 계획을 세웠으나 원정 도중에 병사하니 때의 나이 삼십육세였다.

불쌍한 사나이…?

삼국지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특히 적벽대전을 기점으로 하여 이야기의 축은 유-관-장 삼형제에서 제갈양으로 급격히 쏠려버린다. 그때까지 유-관-장 삼형제의 행적을 보면, 주인공급은 주인공급인데 도저히 생색이 나지 않는 (집도 없고 절도 없고…) 주인공이라, 조조나 여포, 동탁 같은 인물들이 나름대로의 캐릭터를 구축하며 전반부를 장식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제갈양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스토리에 뛰어들면서 그 빛이 너무 창대하게 빛나다보니, 전반부에 등장했다면 충분히 나름대로의 인기(?)를 구가할 수 있었을 인물 몇몇이 오히려 자기 이미지마저 깎이면서 사장되버린 경우가 많았다. 그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주유라 할 것이다.

특히 주유의 팬(?)들에게 많은 불평을 들을만한 대목이 바로 주유의 최후에 대한 대목이다. 이 대목 때문에 아직도 많은 삼국지 매니아들은 “주유=다혈질”이라는 이상한 등식을 신봉하고 있으며, “자질은 뛰어났으나 제갈양보다 성품이 어질지 못해 일을 그르친 영웅” 정도로 평가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실제 정사에서 주유는 병들어 죽었을뿐, 제갈양이 약올려서 죽었다거나 하는 기록은 없다. 그밖의 기록에서도 주유가 “성정이 급하다”거나 “어질지 못하다”는 이야기는 없다. 오히려 삼국지 전반부에서 별로 비중있게 다뤄지지 않은 손책의 영역 회복 과정에서 주유의 찬란한(?) 전과들이 나열되어있을 따름이다. (적벽대전에 대해서도 제갈양의 기록은 없고 거의 주유의 전공만 기록되어있다)

정말 제갈양에 미치지 못했을까?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주유와 제갈양은 일대일로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고 본다. 기본적으로 주유는 무장이었으며, 처해있는 상황도 달랐다. (주유는 이미 자기 세력을 닦아놓은 손권의 휘하였지만, 제갈양은 자기 터전이 없는 유비의 휘하였으니 영역을 넓히는데 그만큼 적극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보는 것이다) 다만 특정지역(=형주)을 놓고 같은 시기에 대립하였다는 이유로 비교대상에 오르는 것인데, 결국 형주를 제갈양이 따냈기 때문에 주유가 제갈양만 못하다고 한다면 주유로선 몹시 억울할 일이다.

첫째로 적벽대전이 종료된 후 군대를 몰고 나가 형주땅을 조조에게서 탈환해낸 것은 사실 주유의 군대였고, 유비의 군대는 강하에 머무르던 유표의 아들 유기의 후광을 업고 형주자사 자리를 따낸 것으로 봐도 과언이 아니라는 점이 그렇다. 둘째로 남군태수이던 주유가 제갈양보다 먼저 익주로 나아갈 계획을 세웠으나 아깝게 병사하여 계획을 실행하지 못했다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유가 제갈양보다 낫다느니 견줄만하다느니 하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앞서도 말했듯 주유는 제갈양과 비교할 수 있는 처지와 상황이 아니었고, 주유는 주유 나름대로 자신의 업적을 갖고 있는 장수임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