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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시절] 직속상관들

1997년 12월 20일

내 군대시절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배병장이란 내 고참이다. 한 마디로 인간이 덜 된 이 자식은 입만 벌리면 거짓말인데 머리가 나빠서 조금만 길게 말하면 다 들통이 나는 거짓말이고(그러고도 자기는 들통이 났다는 사실을 모른다. 왜냐하면 머리가 나쁘니까) 자기 자신이 대단히 잘났다는 착각에 빠져 있는데 솔직히 하나도 볼 것 없는 인간이고, 엄살쟁이에다가 겁쟁이이고 도둑질도 서슴지 않는 정말 사회에 쓸모없는 인간이었다. (지금도 사회 어느 구석에서 이렇게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나라가 걱정이 된다) 인간이 불쌍해서 성명 삼자는 밝히지 못하겠지만 ‘배 삼례’라는 별명은 밝힌다. 이 인간에 얽힌 수많은 에피소드는 배삼례이야기라는 목록으로 따로 적었다.

내가 근무했던 계획계란 사무실은 통제실장 직속기관이었는데, 통제실장인 오소령(우리는 흔히 오소리라고 불렀다)이 도통 상관으로 모시기가 어려운 인간이었다. 워드 작업을 시켜서 주루룩 쳐가지고 가면 (이면지도 아니고 보고서라고 새종이에 빵빵하게 찍어간다) 이것저것 고치기 시작하는데 문맥은 하나도 안 건드리고 순 토씨나 순서만 고친다.(예를 들면 ‘이에 시설대대 전 장병은…’을 ‘시설대대 전 장병은 이에…’하는 식으로) 그렇게 새종이로 너댓번 고치면 결국 초안하고 크게 다르지가 않다. 그 문서를 가지고 대대장한테 가지고 결재를 들어가면 대대장이 대대적으로 고쳐서 다시 빠꾸가 된다. 좀 심한 말로 도대체 그 인간이 왜 나와 대대장 중간에 끼어서 일만 복잡하게 하고 있는지 이해가 안 간다.
쓰다보니 열받아서 오소리 얘기를 좀 길게 해야겠다. 이 인간, 만만한게 난지 맨날 나보고 밤에 워드칠 거 있다고 야간작업 내려오게 하고 지는 손님하고 얘기하느라 9시 넘어서 퇴근하면서 나한테 일거리를 홱 던져주고 간다. 진작 줬으면 한두 시간이면 칠 걸 쓸데없이… 하여튼 가면서 하는 말 “내일 아침에 볼 수 있게 해놔” 뭐 가뿐하게 놀면서 치고 올라가면 점호도 끝난 11시 정도. 그리구서 다음날 출근하면 아침부터 어딜 돌아다니다가 점심시간 다 되서 찾는다. 결국은 야근할 필요가 없었다는 얘기다, 내 말인즉슨. 물론 가져가서 또 고치고 고치고… 악순환은 계속 되는 거지만.

이것도 오소리 얘긴데… 우리 부대 근처를 흐르던 강에 송유관이 터졌다던가 하면서 기름이 새어들어가는 사건이 있었다. 대민지원 차원에서 우리 부대가 복구작업에 투입되었는데, 이미 대대적으로 사역인원이 투입된 상태라 당시 일병 고참이었던 나를 포함한 4명이 바깥으로(!!) 사역을 나가게 되었다.(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사람은 이 기분을 모른다) 기름이 번지지 않도록 강 상류에 중장비로 둑을 쌓고 있었는데, 이 둑이 무너질지 모른다며 둑에 비닐을 덮겠다는 것이 오소리의 생각이었다. 나는 둑 위에 비닐을 얹은 다음 위에서 흙을 뿌리면 비닐이 처지면서 자연스럽게 둑을 감싸지 않겠느냐는 아이디어을 냈는데, 오소리는 가볍게 묵살하고 우리들에게 명령했다. “팬티만 남기고 벗어! 그리고 물에 들어가!” 당시는 한창 추운 1월이었다.
머리가 크기만하지 도대체 뭐가 들었는지 알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사람이 들어가서 작업이 가능한 환경이 아닌데 아무리 군바리라고 얼음물에 벌거벗고 들어가라는 명령을 태연하게 내린단 말인가. 결국 나를 제외한 세 놈이 (나는 최고참이었으니까) 옷을 벗고 풍덩풍덩 물 속에 뛰어들었지만 대뜸 한 놈이 튀어올라왔고 작업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둑에 비닐을 씌우는 작업은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