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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만 칸, 그녀가 원했던 길

2003년 12월 25일

가만히 살펴보면, <기동전사 Z건담>의 스토리는 그때까지 TV에서 방영되었던 어떤 로봇물 만화영화보다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복잡함을 가장 단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단순한 적군과 아군의 싸움이 아니라 에우고 – 티탄즈 – 액시즈로 이어지는 삼국지 구도로 진행된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삼국지와 초한지와 열국지를 비교하면서 열국지는 진시황의 진나라만 너무 강하고, 초한지는 유방과 항우의 일대일 대결이지만, 삼국지는 세 나라가 서로 어우러지면서 얽히고 설키는 재미가 최고라고 말한다는데, <기동전사 Z건담>이 딱 그 모양인 셈이다.

하지만 <기동전사 Z건담>도 전체 50화 중 무려 31화가 진행될 때까지는 액시즈가 전면에 나타나지 않았다. 32화에서야 비로소 액시즈가 모습을 드러내면서 비로소 <기동전사 Z건담>이 본격적인 삼국지 구도를 갖추게 되고, 그때까지 티탄즈의 여러 인물들이 나눠먹고 있던 안티히어로 이미지를 한방에 깨부수면서 단숨에 <기동전사 Z건담>의 기둥캐릭터로 떠오른 인물이 바로 하만 칸이었다. <시로코 – 뭔가 부족한 안티히어로>라는 글에서도 썼었지만, <기동전사 Z건담>에는 유난히 많은 안티히어로들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하만 칸의 카리스마가 <기동전사 Z건담>의 최강 안티히어로로서 손색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껏 그녀의 인기는 시로코나 제리드를 훨씬 뛰어넘고 있다. (아… 단순히 여성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물론)

구 지온의 부흥을 꾀하는 액시즈의 실질적인 총수(명목상 총수는 미네바 자비)이며 극의 후반부를 이끌어갈 강력한 카리스마의 안티히어로가 등장한 것에 대해 나는 다분히 “샤아 아즈나블”을 의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코로니레이저 전투에서도 드러나지만, <기동전사 Z건담>의 양대 주인공을 카미유 비단과 샤아 아즈나블이라고 한다면 그들에게 각각 대응하는 안티히어로가 티탄즈의 펩티머스 시로코와 액시즈의 하만 칸으로 맞춰주기 위함으로 보는 것이다. 사실 카미유에게는 개인적인 원한관계가 얽히고 설킨 제리드라는 괜찮은 호적수가 있었다. (호적수…라는 표현은 좀 아깝긴 하다) 그렇다면 카미유가 제리드와 싸울 동안 샤아는 시로코를 상대한다… 이런 구도도 어쩌면 제작진들 사이에서 고려되었을지도 모른다. 에우고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된 샤아와 티탄즈를 사실상 접수한 시로코의 마지막 대결이라면 제법 흥미진진한 이벤트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리드의 역할이 줄어들면서 카미유의 상대는 시로코로 정리되었고, 그에 따라서 샤아의 마지막 상대는 티탄즈가 아닌 액시즈의 하만이 된 셈이다. 카미유에게 액시즈를 붙여주지 않고 굳이 샤아에게 하만을 붙여준(?) 이유에 대해선 샤아의 안티히어로를 너무 그의 이상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쪽에서 고르는 것보다는 어떻게 보면 그의 등뒤를 노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액시즈에서 고르는 것이 더 드라마틱하지 않았겠느냐, 그런 생각을 했다고 보는데… 어쨌든 액시즈라는 존재의 등장 자체가 갖는 의미를 “샤아의 호적수로서 극의 후반부를 장식하기 위해”라고 본다는 말이다.

이렇듯 중차대한 임무를 맡고 나타난 액시즈의 총수가 하필 20대의 여성이라는 점은, 앞서 말했지만 샤아 아즈나블을 다분히 의식한 것이기도 하고, 또한 어린 소녀의 후견인이면서 섭정이라는 위치는 팔팔한 사내나 중후한 노인이 맡기에는 어딘가 어색해보이는 면이 있다. 어린 꼬마소녀가 졸졸졸 잘 따를만한 그런 캐릭터가 딱 20대 여성이니까. 게다가 젊은 여성이라는 설정은 샤아와의 과거에 대한 갖가지 추측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면도 있고, 어떻게 보면 <기동전사 건담>에서 마지막으로 지온공국을 이끌었던 야심만만한 여자 키시리아 자비의 클론처럼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부분이었다. 그렇게 역할과 배경이 설정된 하만 칸이 드디어 <기동전사 Z건담>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바로 33화에서부터였다.

<기동전사 Z건담>에 등장하여 활약한 하만 칸의 모습은, (나중에 각종 설정집에서 드러난 모습은 제외하자) 분명 미네바 자비라는 꼭둑각시를 앞세우고 자신의 야심을 실현시키려는 여성의 모습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녀는 뉴타입의 이상도, 지온의 이상도 없었고, 좀 심하게 말하면 자비가의 부흥이라는 목표도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고, 오로지 자신의 야심만을 앞세운다고 말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ZZ에서 좀더 확실하게 나오기는 하지만… ZZ는 미네바 자비의 가짜 문제가 얽혀서 해석이 좀 분분하다) 기본적으로 자비가의 일원이 아닌 사람이 자비가의 부흥을 외치는 것부터 (시청자들에겐) 약간 의심스럽게 보이도록 되어있는데, 극 중에서 하만은 그런 의심을 풀어줄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고 오히려 계속 맞장구만 쳐주고 있으니… 그것은 어느 정도 액시즈와 완전히 연을 끊지 못한 샤아에게 “하만 칸은 아니다”라는 확신을 심어주기 위한 장치라고 봐도 큰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지온의 이상은 아니더라도 자비가의 부흥에라도 좀 충실했더라면, 미네바의 충신다운 모습만 좀 보여줬더라도 샤아와 하만이 막판에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사이가 됐겠는가.

애시당초 하만 칸이라는 캐릭터의 등장은, <기동전사 Z건담>에서 샤아의 마지막 상대를 해주기 위한 정도 이상을 기대하지 않았었나보다. 그녀의 모든 면이 샤아와 연루되고 샤아와 대립되며 샤아를 통해 해석된다. 그렇다면 하만 칸은 <기동전사 Z건담>의 마지막 장면에서 샤아를 짓밟은 뒤 유유히 사라져버리는 것으로 그녀의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한 것이 된다. 하지만 후속편인 <기동전사 건담 ZZ>가 나왔을 때, 그녀와 액시즈는 어쩔 수 없이 아가마-에우고-연방군의 유일한 상대자로 불거지게되고 계속해서 무리한 전투를 감행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기동전사 건담 ZZ>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여럿 있는데, 뭐 애들 잔치라는 말은 다들 하는 말이고, 내가 나름대로 카리스마 있다고 생각해온 야장 게블이 코믹캐릭터로 변질된 것도 그렇고, <기동전사 Z건담>에서 나름대로 훌륭하게 제 역할을 해줬던 하만 칸이 <기동전사 건담 ZZ>에서 내내 억지로 끌려나온 것처럼 등장한다는 사실도 그 이유 중의 하나이다. (다른 사람은 어땠을지 몰라도, 나는 정말 하만 칸이 억지로 끌려나와있다는 느낌을 계속 받았다) 결국 부하의 배반에 이어 마지막 전투에서 자살하듯 죽음을 선택하는 하만 칸의 모습을 보면, 차라리 <기동전사 Z건담>에서 샤아의 빔라이플에 꿰뚫려 최후를 맞아버리는게 더 낫지 않았겠는가, 그런 생각도 들곤 한다. 하만 칸, 그녀가 원했던 길은 오히려 그 편이 더 가까웠을지도 모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