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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울의 움직이는 성] 미야자키 감독, 거기까지.

2005년 8월 21일

미야자키 하야오의 신작,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국내 개봉을 앞두고 한국 영화팬들의 기대는 “상당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이웃의 토토로>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모노노케히메> 등의 옛날 작품이 개봉되기도 했고, 스튜디오 지브리의 명성에 대해서도 인터넷과 각종 매체를 통해서 충분히 학습할 수 있었고, 그런저런 것에 전혀 관심없던 사람들도 “베를린 영화제 금곰상”이라는 삐까번쩍하는 타이틀을 달고 실시간 개봉(다른 미야자키의 작품들은 이미 일본에서 개봉된 지 오래된 작품들이 뒤늦게 개봉되었다는 점과 비교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임)했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보고 미야자키의 팬이 되어버린 이후였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국내 흥행기록은 200만명 이상으로 알고 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그것보다 많았고)

개인적으로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나아쁜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예전의 지브리 애니메이션들을 연상시키는 요소가 너무 많았고, 기본적으로 기존의 미야자키 작품들에 비해서 그리 새롭다거나 발전했다거나 하는 (컴퓨터그래픽은 아무래도 좋아지는듯… 기술이 발전하다보니) 부분을 찾아내지 못했었기 때문에 다음 작품인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대해서도 그리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었다. 오히려 <센과 치히로…>의 실패(?)를 발판삼아, “움직이는 성이 나온다니 이건 라퓨타의 오마쥬인가?” “잘생긴 마법사와 마법에 걸린 소녀=할머니가 주인공인 모험물이라니 코난-라퓨타의 업그레이드 버전인가?” “몇 번 일본적인 내용으로 잘 팔아먹더니 다시 옛날 버릇으로 돌아가 중세 유럽 이야기네?” 이런 식의 생각만 남발하고 있었던 거다.

뭐랄까,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흥행에서는 나름 대박이 났지만 사람들이 ‘엉뚱하다’ ‘유치하다’ ‘재미없다’라고 입소문을 낸 이유는 대개 그 줄거리(플롯)의 정교함이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막판에 변신하는 무대가리까지…) 하지만 그건 미야자키가 원작으로 삼았던 소설을 축약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탓이라고 어느 정도 변명이 가능하다고 치면, (그 소설이 일본에서는 이미 대단히 히트를 쳤던 모양이다. 그래서 미야자키가 영화화를 결정할 정도로… 국내에서는 영화가 소개된 다음에야 조금 팔린 정도겠지만…) 정작 문제는 그 내용이라는 것이 ‘마법’ ‘반전’ 이런 상투적인 주제를 빼고나면 미야자키의 전작들과는 아주 많이 다른 작품이었다는 것이었다. 미야자키에 열광하고 미야자키에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는 조금 싱숭생숭한 결론, 조금은 무겁게 보이는 주제를 늘어놓다가 막판에 마법에 걸린 왕자 운운 해버리면서 갑자기 관객들을 초딩 수준으로 만들어버리는 (그 대목에서 극장 안에 있던 관객들이 어찌나 허무한 웃음들을 터뜨려대던지…) 일관성의 부재 등이 매우 조악하게 느껴지고, 그래서 실망하고… 그런 수순을 밟아갔다는 말이다.

그럼 난 뭐냐. <센과 치히로…>가 미야자키의 전작들에 비해서 별로 나아지지도 달라지지도 않았다고 투덜투덜거렸던 놈이라면 적어도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그런 부분만큼은 인정해주었어야 하지 않느냐… 이런 결론이 나와버리니 말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럴 수가 없다. 첫째로 달라졌다고 해봤자 그동안 반복되던 이야기의 조금 다른 변주곡에 불과하고, 다음으로 그것이 전혀 과거의 그것보다 나아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나는 우선 미야자키가 최초로 로맨스를 그렸다는 “홍보문구”에 동의할 수 없다. 과거 미야자키의 작품에는 “로맨스”가 정녕 없었나? 그것은 미야자키의 전작들에서 다룬 주제들이 “성장”과 “환경”에 국한되어있다는 식의 단편적인 시각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다. 수능시험 보는 것도 아닌데 왜들 영화를 보면서 단답형 문제 풀 듯 하시는가.

전체적으로 보고 짧게 평하면,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천공의 성 라퓨타>와 <붉은 돼지>의 다운그레이드 짬뽕 버전 정도가 아닐까 싶다. 미야자키도 과거에 자신이 만들었던 작품들과 뭔가 다른, 새롭게 하고픈 이야기를 새로운 이야기틀에 담아서 하려고 했던 노력은 보였다고 생각되지만, 아쉽지만 결과물이 그렇게 썩 좋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면 이런 정도의 작품을 내놓을 거였으면 그냥 지브리 스튜디오의 다른 디렉터 한 명 시켜서 만들라고 해도 됐을 것 같은데, 왜 굳이 은퇴하겠다는 말 계속 번복해가며 자기가 나서는지 모르겠다. 나에게 있어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모노노케히메> 그 이전까지다. 아쉽게도.

PS.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일본내 평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흥행은 왕대박이 난 걸로 알고 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역대 흥행 1위였는데 그걸 넘었는지 안넘었는지 그 정도로 알고 있는데… 뭐 우리나라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흥행을 가볍게 넘어버렸으니 흥행 성적만 놓고 작품을 말하기는 좀 뭐 할 수 있다. 게다가 일본에서는 희대의 꽃미남, 기무라 타쿠야가 주인공 하울의 성우를 맡았다는 뉴스꺼리까지 있지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