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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래즈베리… 레디스탑영화제

2010년 12월 23일

2001년 당시 “레디스탑 영화제”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린 후 정리해서 다시 제 홈페이지에도 올렸던 글인데… 알 수 없는 이유로(본인이 했겠지만 기억이 안남) 삭제된 후 텍스트를 찾을 길이 없었드랬죠. 며칠 전 우연찮게 서핑하다가 “이병헌 팬사이트”에서 누가 이 글을 퍼간 걸 발견해서 “자료보관차원”에서 다시 가져와 올립니다.
확실히 2001년쯤에 쓴 글을 다시 읽어보면 애가 날이 시퍼렇게 서있군요.

늘상 강조하는 바이지만 나는 영화매니아가 아니다. 그저 심심할 때 시간때우기 위해 영화를 볼 뿐이며, 간혹 영화에 들이는 돈이 아무리 생각해도 거금인 것 같고 시간 또한 두세 시간이나 그냥 낭비해버린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보니,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영화의 사전정보를 닥닥 긁어모아 내가 볼 영화를 까다롭게 고르는, 그저 그런 평범한 사람이다. 이렇게 영화에 대한 애정이 별반 없다보니, 또 세상에 대한 시각이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보니 나는 항상 영화의 흠을 잡고 깎아내리는 쪽에 가깝게 서있었다. 골든 래즈베리 시상식을 내 홈에서 소개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그런 것이었다.

골든 래즈베리를 내 홈페이지에 싣기 위해 자료를 모으면서 “한국에는 왜 이런 이벤트가 없는가?”라는 생각을 해봤다. 누군가를 비판하는 것과 비난하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토론문화의 부재, 다양성보다 획일성을 추구해온 군사문화, 예절과 윤리에 얽매여 상대방을 자극하는 것을 꺼리는 유교문화 등을 꼽아볼 수 있었지만,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었으니 그런 문제는 막말로 극복되어가는 과정이었고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국의 골든 래즈베리”를 탄생시키는데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은 (내 결론이다) 바로 “한국영화를 죽이는 일”이라는 반론이었다. 직배영화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부터 스크린쿼터 축소 논란 등으로 한국영화는 끊임없는 위기의 시절을 보내왔는데, 여기에 “한국 최악의 영화”를 뽑는다는 이벤트는 “영화인의 창작열의를 저하시키고” “헐리웃의 대자본과 힘들게 싸우고 있는 한국영화의 김을 빼는 일”이라는 반론에 직면할 것이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아무 것도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지만, 한때 4대 통신망의 영화동호회 시삽들에게 통신동아리 연합으로 “한국의 래즈베리”를 출범시켜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해볼 생각도 했었고, 내가 몸담고 있는 영화동호회 같지 않은 영화동호회에서 자발적으로 작게나마 “한국의 래즈베리”를 치뤄볼 생각도 했었다. 내 홈페이지에 어느 정도 방문객이 쌓이면서 이 사람들을 활용해 “한국의 래즈베리”를 시작해볼까도 생각해봤고, 몇몇 발넓은 지인들을 활용해 “한국의 래즈베리”를 해보는 방안도 심각하게 고려해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하나도 구체적으로 실행해본 것은 없었다. 나의 천성적인 게으름이 8할이었다면, 2할 정도는 “한국영화를 죽이는 짓이다”라는 거센 반론이 일어났을 때 거기에 일일이 대응하기 귀찮다는 정신적 피곤함이 이유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런 반론에 맞서 할 말이 없는 것도 아니다. 첫째로 종기는 도려내고 고름은 짜내야하는 법인데, 분명히 만들어지고 상영되고 있는 형편없는 한국영화들을 단죄(?)하지 않고 지나간다면 그 영화들은 어쩌면 평생 만들어질 것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내 홈페이지에 있는 “태권브이 성공의 뒷면“이라는 글을 보면 내가 “태권브이의 표절성에 대해 정확한 진단을 내린 적이 전혀 없고 단지 그 상업적 성공에만 심취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80년대 표절만화의 양산이 이루어졌다”라고 주장하고 있음을 알 것이다. 한국영화도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한국영화가 상업적으로 (그것도 국내에서만) 헐리웃영화에게 꿀리지 않는다는 현실에 만족하다간 어떤 처참한 결과가 나올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바로 한국영화가 국내시장에서는 상업적으로 헐리웃 영화에게 꿀리지 않을 정도로 발전한 것이 영화시장 개방으로 인한 영화인들의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것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실제로 UIP사의 영화 직배가 시작된 이래 영화 제작 편수는 현저히 줄어들었으나 영화의 질이 향상되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 당시 극장에 심심찮게 걸리던 극장용 에로영화들이 죄다 16mm 비디오영화로 편입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제작편수가 그다지 줄어든 것도 없다. 오히려 늘어나지 않았을라나? 칭찬만 듣는 어린이는 절대로 크게 될 수 없다는, 다시 말해 어린이는 패야 교육이 된다는 굳은 심지를 갖고있는 나로서는 “비판이 한국영화를 죽인다”는 반론에는 코웃음밖에 나오지 않을 것이다.

둘째로 직배영화가 들어오면서 극장에서 자취를 감춘 것은 한국의 삼류에로영화였듯, 한국에 골든 래즈베리가 생긴다면 극장에서 자취를 감추는 것은 삼류영화들일 수밖에 없다는 거다. 무조건 영화를 까내리자는 것이 골든 래즈베리의 취지가 아닐진대 왜 “한국영화를 죽인다”고 지레 겁을 먹는 것인가. 내가 영화를 똑바로 만들면 절대 욕먹지 않는다. “내 영화를 죽인다”고 말하는 영화인들은 삼류영화밖에 만들지 못하는 영화인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갈 것은, 내가 말하는 삼류영화는 B급영화가 아니라는 점이다. B급영화를 한국영화계에서 몰아내자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내가 “한국의 래즈베리”를 떠올리면서 줄곧 갖고있었던 개념은 “공정성”이었다. 내가 영화를 보는 시각이 가장 공정하다는 주장이 아니라 각계각층의 여러 의견이 객관적으로 종합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쉽게 말해서 내가 심사위원장을 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나는 아무 힘도 없고 누군가 객관성을 가진 사람이 심사위원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럼 누가 객관성을 가질 수 있을까? 내가 처음 심사위원으로 4대 통신망의 영화동호회를 떠올렸던 것은 영화에 대해 평균 이상의 관심과 지식을 갖고 있는 대규모 사람들의 모임이 가장 객관적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불특정다수가 아닌, 조직 안에서 어느 정도 의견이 걸러질 수 있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이 생각엔 변함이 없다. 몇몇 마음에 맞는 사람끼리 모여서 자기들의 호불호로 최악의 영화를 선정하는 것은 정말로 한국영화를 죽이는 일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쨌든 아마 나한테 맡겨놨으면 영원히 이뤄지지 않았을 “한국의 래즈베리”가 2001년 드디어 태어났다고 한다. “레디스탑 영화제”라나… 골든 래즈베리가 아카데미 시상식 전날 수상자를 발표하니까 레디스탑은 대종상 시상식 전날 수상자를 발표한다고 한다. 어차피 본따서 출범한 것, 그 정도 베껴옴은 일면 당연하다고 본다. 그러나 유감스러운 점은 레디스탑은 “네티즌의 인터넷 투표”를 기반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1차 네티즌 투표에서 후보 셋을 추려내어 2차로 다시 심사한다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네티즌에 의한 영화제”라는 방식에는 불만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절대 객관적이고 공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TV 가요순위프로가 네티즌 투표하고 엽서 투표한다고 공정해지던가? 한 사람의 중복투표를 막는 장치도 사실상 없는 것 같고 (회원제도 아니더라) 관람객이 많았던 영화일수록 표가 몰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아니, 아마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정작 아주 형편없어서 관객 동원에 쫄딱 실패해버린 영화는 한두 표도 얻지 못할 수 있다는 말이다. 골든 래즈베리가 블록버스터를 대상으로 하는 안티영화제는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네티즌 투표의 결과가 과연 “한국의 삼류영화(다시 강조한다… B급영화가 아니다)를 골라내는데 효율적인가”라는 의문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두번째로 지적해야만 하는 것은 네티즌들이 행사할 수 있는 것이 오로지 마우스 클릭으로 인한 한 표뿐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초등학교 반장도 그렇게 뽑고 있지만, 차원이 다른 문제다. 내가 생각하는 최악의 영화에 아무런 촌평도 없이 그냥 이름만 적어서 내는 것이 과연 공정한 심사에 도움이 된다고 보는가? 나는 택도 없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별로 고민하기 싫어하는 많은 네티즌들은 그저 통신이나 잡지, 신문, TV 등에서 안좋게 평하던 영화들을 아무 생각없이 클릭할 가능성도 아주 높을 것이다. 나는 “한국의 래즈베리”가 그렇게 생각없이, 분위기 타듯, 중우정치하듯 결정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본다. 정확히 말하면 싫다.

결국 사람들이 많이 본 영화, 매스컴에서 통신상에서 두들겨 맞을만큼 맞은 영화들이 뽑히게 되있다면, 굳이 네티즌들의 투표를 거치지 않아도 지금 당장 내가 수상작은 몰라도 세 편의 후보작 정도는 꼽아낼 수 있다. 아마 투표 결과와 그렇게 많이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바이다. 비…로 시작하는 영화와 단…으로 시작하는 영화들이 휩쓸지 않겠는가? 또, 천…으로 시작하는 영화와 광…으로 시작하는 영화에 표를 던진 사람 중에 정말 그 영화를 보고 정말 최악이다라며 표를 던진 사람과 어디서 들은 정보로 최악이래더라 하며 표를 던진 사람의 비율이 어느 정도 될 거라고 생각하는가?

레디스탑. 이제 시작이다. 시작하는 이들에게 초장부터 재수없는 소리하고싶지는 않지만 남에게 쓴소리를 하겠다면 자신들도 쓴소리를 들을 각오가 되있으리라고 믿는다. 정말로 한국영화계에 새로운 대안이 되고 싶다면 불특정다수인 네티즌에 기대지 말 것을 진심으로 권한다. 그리고 취지에서 밝히기도 했지만, 수상작의 논의과정과 심사평 등을 투명하고 공정하게 밝혀내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다른 건 몰라도 내년에도 다시 이 영화제를 하고 싶다면 말이다.

2001. 4. 23

후일담 격으로 추가하자면 레디스탑영화제는 2003년, 3회까지 시행되었으나 그 후 행방을 알 수 없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