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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란 이바니세비치

2001년 7월 10일

이 글은 얼터너티브 스포츠웹진 후추(http://www.hoochoo.com)의 [독분비관] 게시판에 올렸던 글입니다.

장담하는데 이바니세비치가 아닌 헨만과 래프터가 결승에서 붙었다면
여인천하를 포기하고 윔블던 결승을 보지는 않았을 겁니다.

처음 이바니세비치의 이름을 들었을때 그의 이름 앞에 붙어있던 수식어
“대포알 서비스”
아마 윔블던 특집으로 실린 신문기사에서
윔블던에선 강한 서브를 가진 선수가 유리하다,는 꼭지였던 것 같습니다.
서브가 강한 선수를 하나둘 열거하면서
현재 테니스선수들 중 가장 강한 서브를 가진 선수는 이바니세비치다…
뭐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거의 10년전이니까 그후 더 강한 서브를 가진 선수가 나왔는지
아예 그 신문기사가 틀렸었는지 그건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제 뇌리에 박힌 개념은
윔블던은 강한 서브를 가진 선수가 유리하다.
이바니세비치는 강한 서브를 갖고 있다.
근데 윔블던에서 헤맨다. (당시 윔블던 4강이 최고성적이었을겁니다)
아마 서브만 강하지 다른 건 볼 거 없나보다.
이런 식이었습니다. (매우 단순한…)

저 자신 많은 결함을 갖고있다보니
완벽한 에이스보다 어딘가 좀 떨어져보이는 인간한테
정이 많이 가는 스타일입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이바니세비치라는 외우기도 힘든 이름에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었지요.

1992년 드디어 이바니세비치는 윔블던 결승에 올랐습니다.
아마 애거시랑 붙었지요.
저의 단순한 개념으로는 “윔블던은 강서버가 유리한데 애거시는 강서버가 아니다. 아무리 이바니세비치라지만 지금이 우승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아닌가?”라는 결론이 참으로 쉽게 도출되었습니다.
…어리석은 녀석.

결과는 풀세트까지 갔지만 애거시의 윔블던 첫우승이었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인가…? 뭐 아직 현역이니까. 하여튼.
하지만 그 후부터 이바니세비치의 기량이 단순한 강서버의 수준을 넘어서기 시작하더군요.

아마 랭킹2위까지 올라간 적도 있지요?
94년도 군대에서 본 윔블던 결승은 아마 샘프라스에게 졌던 것 같고…

제대하고 테니스를 접하기 힘들어지면서 신문기사로나 누구누구의 우승, 이런 소식을 접하게 되니
이바니세비치란 이름도 점점 멀어지더군요.
98년도에 또 윔블던 준우승했다는 말은 들었는데
아 짜식 아직도 안되는구만, 이런 생각이 들었더랬습니다.


그러다가 오랜만에 그의 이름을 다시 들었으니
바로 이형택과 붙었다가 라켓을 다 부숴버리고 기권한 그 경기였습니다.
랭킹이 허벌나게 떨어져있더군요.
그래, 강서버로 먹고살던 넘이 나이먹어 힘떨어지면 뭘로 버티겠냐…
솔직히 단순한 테니스팬인 저는 그런 생각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윔블던.
랭킹이 낮아서 와일드카드로 나왔다는 말은 들었는데
사실 챙겨볼 생각은 안했습니다.

그냥 아무생각없이 채널돌리다가 어느날 전날경기 하이라이트를 보여주는데
앤디 로딕과 이바니세비치의 경기더군요.
둘 다 서브 강력하게 넣지만
윔블던 3회 준우승의 관록이 이바니세비치에게 묻어나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직 로딕은 잔디코트를 활용할 줄 모른다는 생각도…

잘나가는 신예를 노련미로 꺾긴 했지만
이바니세비치도 그리 오래가지 못하겠군… 다음 상대는 사핀이라며?
이렇게 생각하면서 경기 다음날 스코어를 봤습니다.
사핀을 이겼더군요.

엇 이 인간 삘 받았나부다. 혹시 모르겠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헨만과의 준결승.
시작시간 정확히 체크해서 TV 켰습니다.
첫세트를 따내더군요.
솔직히 헨만 잘하는 건 알지만
왠지 이바니세비치의 서브게임을 따내기 힘들게 느껴졌던 건
순전히 제가 이바니세비치를 응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첫세트 이바니세비치가 따내고
두번째세트 타이브레이크 끝에 헨만이 따내고
세번째세트 할라는데
내일 출근해야하는 직장인으로서
쏟아지는 잠을 주체하지 몬하고
TV 끄고 잤습니다. (그때 시간 새벽1시… 내가 유로2000 결승은 날새고 봐도 윔블던 준결승은 아직 삘이 안꽂히는 모양임다)

담날 일어나서 신문이랑 뉴스를 챙겨보니
우천연기!
하늘이 나보고 경기를 끝까지 보라는 신의 계시 같았슴다.

경기 속개 시간 챙겨서 또 TV 앞에 앉았습니다.
세번째 세트 6-0으로 말려버렸는데 (나중에 재방송으로 못본 경기 다 봤습니다)
네번째 세트에서는 또 살아나더군요.
네번째 세트 따내는 거 보고 또 우천연기.

솔직히 저는 이바니세비치의 체력에 의문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특히나 강서버가 체력이 떨어져 서브의 속도가 떨어지면 한팔 접고하는 것 아니겠냐는 나름대로의 생각때문에
이바니세비치가 장기전으로 가면 헨만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할 거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세번째세트 6-0은 그런 심증을 굳혀줬구요.
그런데 비가 오는 바람에 어떤 의미에선 이바니세비치의 체력이 세이브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두번의 우천연기는 그런 의미에서, 특히 세번째세트 6-0의 파죽지세가 끊겼다는 점에서
헨만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늘이 이바니세비치에게 우승을 주려는 건가? 요런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어쨌든 사흘에 걸쳐 치뤄진 준결승은 이바니세비치가 천신만고끝에 따냈습니다.
이제 결론이 단순해지더군요.
네번째 준우승이냐, 첫번째 우승이냐.

그래서 어제 그 역사적인 순간을 지켜보기 위해 다시 TV 앞에 앉았습니다.
소문난 여자와 여인천하를 포기하고…^^;
첫세트, 이바니세비치가 래프터의 서브게임을 브레이크하면서 6-3으로 이기더군요.
두번째세트는 오히려 이바니세비치가 서브를 놓치면서 자신의 첫서브게임을 놓쳐 6-3으로 졌습니다.
세번째세트에서는 다시 이바니세비치가 래프터의 서브게임을 브레이크해 6-4.
네번째세트에서도 또 이바니세비치가 서브게임을 놓치더군요.
듀스 상황에서 더블폴트로… 뭐 확실한 폴트였지만 이바니세비치는 라켓을 집어던지고 네트를 걷어차며 심판에게 항의합니다.
fucking 뭐라고 하던데… ^^;

어쨌든간에 요기서 이상한 공통점을 발견했는데
먼저 서브게임을 가져와 첫게임을 따내는 쪽이 심리적으로 우위에 있는지
연속적으로 그 세트를 따냈다는 거지요.
사실, 먼저 서브게임을 가진 쪽이 서브를 잃으면 0-1, 0-2, 1-2 식으로 두게임차로 쫓아가지만
먼저 서브게임을 가진 쪽이 상대 게임을 잡으면 1-0, 2-0, 3-0 식으로 세게임으로 앞서나갈 수 있는 겁니다.
즉 먼저 서브를 넣고 상대 서브게임을 브레이크했을때 역전당할 확률…이라기보단 심리적으로 더 편안할 수 있다는 거죠.
산술적으로는 아무 차이 없습니다만.

그래서 네번째 세트 5-2로 끌려가던 상황에서 이바니세비치의 서브게임…
저로서는 세트의 승부를 떠나 반드시 잡고, 래프터의 서브게임에서 세트를 끝내더라도 다섯번째 세트는 이바니세비치의 서브게임으로 시작하기를 바랬습니다.
(별 쓸데없는 계산을 다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씨봉이 아까의 판정시비로 평정심을 잃었는지 서브를 마구잡이로 날려대 6-2로 세트를 마무리하더군요.

음… 솔직히 불길했습니다.

다섯번째 세트 다시 래프터의 서브로 시작…
여기서부터 저 나름대로 좋은 징조가 보였는데
이바니세비치가 자신의 서브게임을 두번 연속 러브게임으로 따냈다는 겁니다.
래프터로서는 상대방 서브게임을 브레이크하기가 어렵다, 는 심리적 위축을 줄 수 있는 부분이었죠.

그런데… 이게 또 흔들리기 시작했는지 듀스 상황에서 연속 범실로 래프터에게 점수를 퍼주더군요.
그래 니 한계가 거기까지냐… 싶은 탄식이 나오는데…
다시 서브가 살아나면서 결국 그 게임을 잡아 7-7…
여기서 필이 좋았는지 래프터의 서브게임을 브레이크해냅니다.
자신의 서브게임에 대한 자신감이 살아있는 상황에서 브레이크… 8-7.
자신의 서브게임만 지키면 우승입니다.
흥분되죠.
지나친 흥분은 몸에 해롭습니다.

과연 이바니세비치는 자신의 서브게임에서 듀스를 허용하고
강력한 서브로 어드밴티지를 따냈다가 다시 듀스를 허용하는 짓을 되풀이합니다.
세번짼가 듀스 상황에서 깨끗한 에이스로 어드밴티지 이바니세비치…
다음 서브를 코트 정면으로 날려 래프터의 리턴범실…

이바니세비치 코트에 쓰러지고 자다 일어나신 아부지와 저는 환호성을 올렸습니다.


윔블던 우승하고 테니스를 다시 하지못해도 좋다고 말했던 이바니세비치.
이번 대회 어쩌다보니 그를 응원하게 되었지만
앞으로도 그가 재기해서 승승장구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솔직히 아닙니다.
평생의 소원을 안고 달려온 테니스선수가
이제는 멀어졌을 거라고 여겨졌던 순간에 그 꿈을 잡았으니
그것으로 저의 이바니세비치에 대한 이유모를 끈끈한 마음을 이만 접을까 합니다.

잘싸웠다 이바니세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