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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남자] 나쁘긴 뭐가 나빠?

2002년 8월 20일

김기덕 감독이 <나쁜 남자>라는 영화를 내놓았을 때, 한국의 영화 시장 상황(?)은 대충 다음과 같았으니, 조재현이라는 배우가 드라마 <피아노>에서의 열연으로 엄청난 인기를 모으고 있었고, 부산영화제에서 <나쁜 남자>의 야시시한 포스터가 엉덩이를 가렸네 말았네 식의 화제가 되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바보가 아닌 이상, 이 영화의 흥행을 보장받기 위해선 두가지 마케팅 방법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봐도 된다. “조재현을 띄워라!” 그리고 “야한 영화라는 뉘앙스를 풍겨라…!”

언론사까지 동원된 영화마케팅의 집중포화에 엄청 약한 본인으로선, 영화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 <나쁜 남자>라는 영화에 대해서 두가지 선입견을 갖게 되었다. 하나는 “야할꼬야…”라는 기대감, 또하나는 “대사 한마디 없이 눈빛으로만 카리스마를 분출하는 조재현의 악역 연기…”라는 기대감.

하지만 말이 기대감이지 솔직히 나 스스로 김기덕에 대해서 “스토리텔링이 무지허니 약한 감독”이라는 딱지를 마빡에 떡 붙여놓았기 때문에, <나쁜 남자>라는 영화에서 (나말고도 숱하게 많은 사람들이 씹어대는) 빈약한 스토리 따위에는 애시당초 기대하지도 않았고, 그냥 위에 말한 그 기대감만 충족시켜주면 비디오대여료 천원 정도는 아깝지 않을 거라는 자위에 지나지 않았을 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니 그나마의 기대감조차 이노무 영화가 가차없이 짓밟아버리더라는 말이다… 우선 야하지 않은 거, 요거 많이 아쉽지만 넘어가기로 하자. 사람에 따라선, <나쁜 남자> 수준이면 헉! 저렇게 야할 수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조재현에 대해서는 한소리 꼭 해야되겠다.

이 영화 홈페이지에서 주인공이 정말 “나쁜 남자”인가를 토론회인지 청문회인지를 이벤트삼아 개최할 정도로, 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나쁜 남자”라는 테마는 이 영화에, 주인공인 조재현에게, 또한 관객에게 던져진 화두였다. 까놓고 말해서 “나쁘냐 안나쁘냐?” 이런 질문 하고 싶었던 거다. 그 질문의 뒤에는 “나빠보이지? 하지만 착혀…”라는 의도 역시 숨어있을 거다. “이런 인간이 있는데, 정말 나쁜 놈이지?” 이런 말 하고 싶어서 영화 만드는 감독은 또라이 말고는 없다.

그래서 그런지, 이 영화 내내 조재현은 (적어도 나에게는) 단 한순간도 나쁜 놈으로 보이지 않았다. 나쁜 짓은 오히려 선화가 더 많이 하더라. 멀쩡한 책을 찢고, 지갑 속의 돈을 몰래 가졌으며, 얼굴 이쁘다는 이유로 이웃 창녀의 손님을 뺏았으며, 창녀촌을 도망치기 위해 지를 사랑한다는 남자를 속였다. (마지막 것들은 좀 아닌가…? 넘어가자) 하지만 조재현은, 자기 손으로(직접) 나쁜 짓 거의 안했고 어쩌다 좀 나빠보이면 그거 무마시켜주느라 감독이 무진장 고생하는게 눈에 뻔히 보일 정도였다.

먼저 길거리에서 본 여자에게 키스바리 땡겼다고 하지만, 행여나 티끌이 묻을세라 감독은 그 장면 앞에서 주인공인 한기를 경멸과 경계의 눈초리로 꼴아보는 대학생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키스 장면 뒤에서는 난데없이 나타나 주인공을 폭행하는 해병대원들과 길거리에서 추행당하고도 눈 똑바로 뜨고 (야… 우리나라 저런 여자들만 있다면 성폭행 확 줄어들 거다) 사과하라고 소리소리 지르다가 결국엔 침까지 콱 뱉어주는 당돌갑빠인 여대생을 적절히 배치시켜, 주인공의 행동에 대해 이해와 연민을 확확 몰아쳐주는 고차원 수법을 사용하고 있지 않았나 말이다.

똘마니들 시켜서 선화를 창녀촌으로 끌어넣었다고 하지만, 나는 솔직히 거울 뒤에 숨어서 선화를 지켜볼 때부터 한기의 눈에 카리스마는 커녕 연민과 동정이 물결치고 있는게 뻔히 보이더라. 여자 따먹으려다 실패하는 역할을 단골로 맡는 단역배우가 나와서 선화의 첫손님 역할을 하길래 나는 쟤 성공 못하고 쫓겨나갈 줄 알았고, 처음은 사랑하는 사람과 하고싶다고 선화가 부탁할 때 그것도 들어줬고, 나중에 진짜 첫손님 받을 때도 부하들과 치고나가려다가 포주 아줌마가 말렸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이 영화에서 젤루 볼만했던 야한 장면마저 없어질 뻔 하지 않았던가.

한기의 그나마 나쁜 짓은 요기까지다. 도망친 선화를 도로 데려왔으니 나쁜 넘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때쯤이면 한기가 왜 선화를 창녀촌으로 데려왔는지 관객들이 흠뻑 이해해주고 있어야 한다. 이유가 뭐냐고? 사랑했기 때문이다. 길바닥에서 키스한 것도 사랑했기 때문에 한 거고, 창녀촌으로 데려온 것도 사랑했기 때문이다. 사랑했기 때문에 강간당하듯 손님받는 것을 막아주려고 했고, 지가 사랑한다는 남자와 기회를 주기도 했다. 영화 시작한 지 얼마 안돼서부터 한기의 눈에 “선화 저 년, 사람많은 길거리에서 나를 모욕하고 경멸해? 철저하게 짓밟아주겄어!”라는 한맺힌 뭐시기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선화를 바라보는 한기에게서 뭔가를 갈구하는 듯, (갈구는 듯이 아니다) 동경하는 듯한 느낌은 받았지만 “아니 저 썅년이…”라는 독기는 전혀 못느꼈단 말이다. 그런데 조재현의 카리스마는 뭔놈의 카리스마냐. 불쌍한 뒷골목 깡패밖에 없드만.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것이, 해병대에게 깨지고 침세례까지 받은 뒤 한기가 부하들이 있는 방에서 유리창을 깨는 장면이다. 한기가 화가 난 것은 틀림없지만 과연 그것이 “선화에게 화가 난 것인지”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고민해봐야된다. 넘볼 수 없는 여자를 사랑하게 된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난 것은 결코 아니라고 그대는 딱 잘라 말할 수 있는가? (내가 한기라면, 애들 풀어서 먼저 그 해병대 쒜이들부터 조져놓는다)

그럼 사랑했는데, 왜 창녀촌으로 데려와? 말이 되나? 라고 반문하실 분들이 분명 계시리라 생각되어 부연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그게 한기라는 인간의 방식이었다는 점 말이다. 영화 속에서 한기의 유일한 대사가 무엇이었나. “깡패 주제에 사랑은 무슨 사랑이야” 뭐 대충 이런 거 아니었나? 그렇듯 한기는 지가 깡패니까 저런 여대생을 사랑하면 안된다고 자가진단하고 있었던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여대생과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보니 그 여대생을 창녀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 행동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하나는 여대생을 자신과 같은 레벨로 떨어뜨려서 작업(?)을 쉽게 하겠다는 의도가 있고, 또 하나는 차마 자신이 건드릴 수는 없지만 자신이 항상 감시할 수 있고 지켜볼 수 있는 곳에 그녀를 머물게 하겠다는 의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의 정황적으로는 두번째 의도가 더 크다)

여기까진 좋다. 솔직히, 어우러질 수 없는 두 남녀가 극단적으로 어우러지는 모습의 영화 속 묘사로서 괜찮다. 그런데 감독은 여기서부터 오바를 시작한다. 조재현이 미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창녀촌에서 놀아먹는 깡패임에도 불구하고 정의감과 의리로 똘똘 뭉친 터프가이로 격상되는 부분을 꼼꼼이 따져보자.

먼저 선화를 지켜주려고 두 번이나 손님을 못받게 했던 부분, 이건 앞서서 많이 얘기했으니 넘어간다고 치자. 지금도 혼자 생각해보면 실실 웃기는 부분이 몰카에 관련된 에피소드다. 자기 똘마니들이 몰카를 설치해서 비디오 넘겨먹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똘마니들을 미친듯 후려패는 한기의 모습을 보면, 관객들은 “아… 짜식이 저래도 양심은 있구나”라는 공감대를 팍팍 느끼게 될 것이다. (게다가 그 앞장면에서, 부하가 자신의 비밀-선화를 창녀촌으로 끌어들였다는-을 누설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리창만 부숴버렸을 뿐 부하들을 후드려패지는 않았다는 것과 비교해보면 이 정의감이 얼마나 공익적이고 비이기적인가까지 느껴진다)
게다가 부하의 “사실은 아버지가 간암에 걸리셔서…”라는 말 한마디에 이 정의로운 투사는 당연히 돌변하고, 간암 걸린 아버지를 둔 부하에게 다정하게(?) 담배 한꼬바리를 건네주더니 나중의 대화로 미루어보면 어케 치료비까지 마련해준 듯하다. (음질이 안좋아서 대사 많이 놓쳤다) 창녀촌 깡패 주제에 대단한 정의감과 의리 아닌가. 덧붙여 포스터 말아서 상대방 모가지를 쑤셔부는 장면은 “멋진 남자” 조재현을 장식하기 위한 또하나의 플러스였고, 살인을 한 부하 대신 자신이 사형장으로 끌려가고, 자신을 찌른 부하를 감싸기 위해 칼을 모래에 파묻어버리는 초절정 의리는 차라리 <맨발의 청춘>이 덜 느끼했다 싶을 정도의 신파적인 것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머찐 남자”들이 하나같이 현실적인 문제 – 이를테면 돈 같은 – 에는 별 관심이 없고 어디 만화주인공처럼 싸랑, 의리, 정의 따위에 목숨을 거는지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바, 우리의 “머찐 남자” 조재현씨께서 이 영화에서 나쁘기는 커녕 싸랑, 의리, 정의로 똘똘 뭉친 사이비 나쁜 남자 역할을 무지하게 잘 소화해냈다는 점에 대해서 좋은 소리 한마디도 못해주겠다. 결국 김기덕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는 나쁜 남자가 아니다. 다만 그를 둘러싼 환경이 나빴을 뿐이다” 이거밖에 없는 거 같다. 아니 뭐 그것까지는 좋다고 치겠는데, 그렇다고해서 조재현이 굳이 “왕머찐 남자”가 될 필요까지 있었는지는 도통 모르겠다.

PS. 글 전체 맥락과 별 상관없지만 덧붙이는데… 내가 보기엔 한기가 부하의 칼에 찔리는 장면 이후는 한기의 환상이 아닌가 싶다. 먼저 칼에 찔려 피를 철철 흘리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 담배를 꼬나무는 것부터 그렇고, 사진 속의 얼굴이라거나 한기와 선화가 우연히(영화적으론 필연적일 수도 있다) 만나는 것 등 뭔가 어색시럽다. 한기는 칼에 찔려 죽고, 그 뒤는 한기가 선화와 함께 꿈꿨던 모습을 보여주는 것 정도로 해석되던데…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