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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이야기] 내가 만난 컴맹들

2008년 3월 20일

화면보호기 비밀번호를 몰라서 열흘동안 컴퓨터를 쓰지 못하시고
그걸 “시스템문제”라고 당당하게 말씀하시는 분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킨 기념으로,
내가 직접 겪어본 컴맹들 이야기나 할까 한다.

미리 강조해두지만
전부 실화다.

가벼운 걸로 우선 시작해보자.

군대 있을 때였나,
그때 우리 대대에는 PC가 딱 1대밖에 없었기 때문에
(나중에 2대 더 생겼다. 지금은 뭐 많이 있겠지)
조금 한가한 시간에는 PC가 있는 우리 사무실로
다른 고참들이 놀러와 이것저것 워드도 치고… 게임도 하고…
그렇게 놀다가곤 했었다.

그러던 어느날,
바로 옆 사무실에 근무하는 고참이
전투체육시간에 짬을 내서 워드프로세서를 좀 배워보겠다고
PC를 차지하고 앉아 혼자 이것저것 해보기 시작했다.
놀러나간 고참들 대신 사무실을 지키고 있던 나는
처음에 이것저것 알려주다가, 갑자기 해야할 일이 생각나
다른 책상으로 옮겨 서류를 찾아보고 있었더랬다.

갑자기 고참이 부르더라.
“야, 한글(당시 쓰던 프로그램은 아래한글 1.5)에서 한자로 바꾸는 거 어떻게 하냐?”

마침 서류를 한 무데기나 들고 있던 나는
고참 쪽을 돌아보지 않고 “F9를 누르시면 됩니다”라고 얘기해줬다.

잠시후.
“안되는데”
“예? 아닌데요. F9 맞는데.”
“안돼. F9”
“그럴리가요”
서류가 잔뜩이라 미처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나는
계속 F9키가 맞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고
고참은 고참대로 아무리 F9를 눌러도 한자변환이 안된다고 짜증을 내고.

어쩔 수 없이 내가 일어나서 컴퓨터 쪽으로 갔다.
“정말 안돼요? 해보세요.”
“봐봐 임마”
라고 말하며 그 고참은
“F”를 누르고 다시 “9”를 눌렀다.
될 리가 있나.
실화다.

이와 비슷했던 케이스로
누구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나는데
‘컴퓨터가 다운됐는데 어떻게 하냐’고 묻길래
(옛날 도스 쓰던 시절이었던 거 같다)
“Ctrl키와 Alt키와 Del키를 동시에 누르면 재부팅된다”고 말해줬더니
“하나,둘,셋!”하면서 세 키를 동시에 누르는 걸 본 적이 있다.
그래도 이건 뭐 재부팅에 성공은 했으니.

나중에 전산실에서 일할 때
A드라이브에 디스켓 꽂아놓고 부팅 안된다고 하던 건 뭐 애교 수준이고
(그나마 요즘은 A드라이브가 없어져서 이런 오류가 없어졌지)
어떤 여직원은, 이 여자분 참 어디 유학파라나 그러면서
얼굴도 예쁘고 옷도 무진장 세련되게 입고 다니고 그러던 분이라
뭐랄까 약간 선망의 대상? 그런 식으로 표현할 법한 사람이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자기 컴퓨터가 작동을 안한다고 전화를 했더라.
어이구 만사 제쳐놓고 즉시 출동했지.

가보니 컴퓨터 전원을 넣어도 화면이 안나온단다.
컴퓨터를 들여다보니 전원 들어갔고 팬 돌아가는 소리도 나는데
화면만 안나온다.
모니터 전원 켜주고 왔다.
컴맹이 나오는 우스개에 종종 나오는 상황인데
실제로 겪으니 웃음도 안나오더라.

이건 컴맹 이야기는 아닌데 생각난 김에.
다른 부서에서 프린터가 고장났다고 해서 가봤더니
프린터에 용지 넣는 트레이를 잘못 끼워서
이게 중간쯤에 걸려 들어가지도 않고 빠지지도 않는 상태였던 것.
뭐, 힘으로 하는 수밖에 없잖아.
한참을 낑낑대다가 겨우 트레이를 빼서 다시 맞게 끼웠더니
그 부서 직원들이 “역시 컴퓨터 도사야”라고 칭찬해줬다는.
뭔가 아닌 것 같은데?

다음은 내가 겪어본 최강의 컴맹이야기 두 가지.

첫번째로 유학원 쪽에 잠시 있을 때.
그게 업계 분위기인지 몰라도 나이와 상관없이 컴퓨터에는 완전 잼병이던 유학원 사람들.
그런데 업무상 인터넷, 특히 이메일은 엄청 중요하고 많이 쓰이는 거라
인터넷이나 이메일이 잘못 되는 건 또 엄청 무서워하더라.

그러던 어느날 사장님 이하 여러 사람들이 회의실에서 심도있는 회의를 하더니
결론을 못내리고 나를 불러들였다.
회의실로 들어가보니 서너 명이 사무실 배치도를 놓고 머리를 맞대고 고민중.

“어 이거 말야. 지금 000씨하고 000씨하고 자리를 이렇게 바꿀 거란 말야”
“예”
“그럼 000씨 이메일 주소가 바뀌나?”
순간 주먹이 움찔했다는.
그러나 용케 참고 이렇게 둘러댔다더라.
“안바뀌도록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막 인정받고.

두번째는 교육회사로 옮긴 후
내가 기획한 회원관리시스템을 완성시켜 교육하던 중에 생긴 일.
교육 잘받고 돌아가신 선생님(이면서 아줌마)이 집에서 시스템에 접속을 해보시고는
접속이 안된다며 내가 있는 사무실로 전화.

“예 어떻게 안되시는데요”
“아이디하고 비밀번호를 넣었는데요, 잘못된 아이디래요.”
“예 선생님 아이디가 어떻게 되시죠?”
라고 물어가며 확인해보니 아이디/비밀번호 다 맞게 알고 계시고
내가 입력하면 제대로 로그인되는 상황.

이런 경우에는 솔직히 몇 가지 매뉴얼이 있는데
한/영키 전환이 잘못됐거나
대/소문자 구분을 잘못했거나 하는 경우가 아주 흔하고
드물지만 키설정이 이상한 나라 꺼로 되어있는 경우라거나
아이디나 비밀번호에 띄어쓰기를 하는 분이 가끔 있다.

이 모든 매뉴얼대로 전화주신 선생님과 하나하나 맞춰갔으나
계속 나는 로그인되지만 선생님은 실패하는 상황의 반복.
그렇게 전화기 붙들고 한 30분 씨름했나.
내가 아는 모든 매뉴얼을 총동원하고도 답이 안나오니
결국 모든 걸 처음으로, 원점으로 되돌려서
하나하나 짚어보기로 했다.

“그럼 선생님, 지금부터 저하고 똑같이 입력하시는 거에요.”
“네~” -> 대답은 잘하신다.
“선생님 아이디가 abcde니까요. 자 이제 a를 입력합니다.”
“네~ a~”
이런 식으로 일단 아이디를 한글자 한글자 입력했다.
“자 그럼 아이디를 다 입력했으니 비밀번호를 넣겠습니다.”
순간 이 아줌마가 움찔하는 기색이
서로 얼굴을 보지 않고 있는 통화상태지만 귀신처럼 느껴졌다.
“왜 뭐 이상한 거 있으세요?”
“아니, 저기… 마침표는 안찍나요?”

그냥, 뭐랄까.
하늘이 노래지더라.

요즘도 간혹 그때의 허탈했던 기억이 되살아나곤 하는
시대가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