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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인생] 미스캐스팅

2005년 10월 22일

<달콤한 인생>이라는 영화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출발!비디오여행>에 관한 이야기부터 하고 넘어가야겠다. (이야기의 본론과는 별 상관없는 것 같지만) 세상에, 영화 내용을 개봉도 하기 전에 미리 홀라당 까발려버리는 그 프로그램의 고유한 속성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달콤한 인생>에 관해서만큼은 돌이켜 생각해봐도 좀 심했다. 줄거리에서 맥을 짚는데 중요한 포인트는 죄다 보여주고, 그나마 양심적으로 결말만 쏙 빼놓고 보여준 셈이었으니까. 처음 TV로 소위 “소개하는 장면”을 볼 때는 미리 보여준 장면에서부터 본격적인 갈등이 고조되는가 보다…라고 짐작했었는데, 막상 영화를 보니 미리 보여준 장면 다음이 서로 치고받고 다 죽여서 갈등 해소되는 결말부분이었다. 결말만 빼면, 2시간짜리 영화를 십여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너무나 훌륭하게 요약/편집해서 보여준 제작진의 승리라고나 할까. (절대 칭찬 아니다)

이제 본격적인 영화 이야기. 그런데 어째 이 영화는 보는 내내 줄거리나 장면이나 그런 것보다는 배우들에 대한 생각이 계속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음… <출.비.여>의 폐해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정확히는 영화 이야기가 아니라 배우 이야기가 되겠다.

첫번째로 주인공 이병헌. 연기, 뭐 대충 잘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병헌이라는 배우가 갖고있는 얼굴, 이미지, 연기 스타일이, 조폭 두목의 오른팔 같은 역할을 맡기에 그리 적합하다는 생각은 안들었다. 아 뭐 물론, 과거의 이병헌이라는 배우가 갖는 이미지는 조금 그런 면이 있었을지 몰라도 그런 관객들의 편견을 훌륭하게 극복하고 자신을 재창조해내는 배우들도 얼마든지 있다. 근데 미안하지만 이병헌은 아니었다. 약간은 기름진 목소리, 최지우로부터 “실땅님~” 소리를 들어 마땅한 매끈한 얼굴, 스스로는 다부지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조폭 두목의 오른팔 행동대장이라기보단 강남 제비족에 좀더 어울려뵈는 체형 등이 그랬다. 글쎄, 너무 조폭 두목의 오른팔 행동대장이라는 이미지를 내가 정형화해서 대입시키려고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렇게 무엇 하나 조폭 행동대장스러운 면이 없는 조폭 행동대장이 자기가 조폭 행동대장이라고 몸으로 웅변하며 스크린을 나부끼는 모습을 보고있는게 영 고역이더라는 개인적인 느낌은 솔직히 밝혀야겠다. (많이 봐줘서 잘 훈련된 킬러 정도의 역할이었다고 해도 그렇게 불편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두번째로 조폭 두목 역할을 맡으신 김영철 아저씨. 내가 기억하는 탤런트 김영철의 첫 모습은 “TV문학관”의 <벙어리 삼룡이>에서 타이틀롤, 즉 벙어리 삼룡이 역할을 맡은 모습이었다. (불타오르는 지붕 위에서 아씨 마님을 끌어안고 포효하는 모습, 어찌나 강렬했던지 여태껏 잊혀지질 않는다. 그 장면을 함께 보신 우리 어머니 왈 “한국판 노틀담의 꼽추다”라고 하셨을 정도였으니) 그런 식으로 초기에는 약간 촌스러운, 그런 역을 주로 맡던 김영철이라는 배우가 연기력이나 뭐나 조금씩 인정받으면서 나중에는 주연급 역할도 많이 했다. (“태조왕건”에서 궁예로 워낙 뜨긴 했지만 궁예를 하기 전에도 잘나가는 편이었던 주연급 탤런트였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나한테는 여전히 “벙어리 삼룡이”에 머물러 있었다는 얘기다. (이런 식이다. “어, 삼룡이가 궁예 역을 맡았네”) 마치 김수미가 평생을 일용엄니에서 못 벗어나듯이. (이래서 배우들은 고정이미지가 참 문제다) 김영철로서는 나름 궁예의 이미지를 벗어보고자 머리도 염색하고 별로 폼도 안나는 조폭 두목 역할을 맡았는지 모르겠지만, 대다수의 관객들과 달리 내가 갖고 있는 김영철의 이미지는 “궁예”가 아니라 “벙어리 삼룡이”였기 때문에, 궁예나 조폭두목이나 안어울리기는 매한가지였다는 말이다. (지금이라도 “대추나무 사랑걸렸네”에 이장 정도로 출연하면 참 어울릴 것 같다. 절대 안하겠지만)

메인급이랄 수 있는 두 배우/역할에 대해 이렇듯 불평을 가득 품고 영화를 보다 보니, 영화에서는 죽이네 살리네 피터지고 있는데(비유가 아니라 진짜 피가 터지더만. 물론 “진짜” 피는 아니겠지만) 영화를 보고 있는 나는 그다지 감정이입도 안되고 시큰둥, 그러게 왜 고생을 사서 하고 있냐, 용서를 빌라고 할 때 싹싹 빌지, 아니 그걸 왜 싹 묻어버리지 왜 도로 끄집어내서 저 고생인가, 이러구 있었을 뿐이었다. 간간이 나오는 좀 재밌는 설정이나 멋있는 장면에서나 조금 히죽거렸을 뿐.
(그러고보니, 꽤 재밌는 장면일 수 있었던 “누가누가 총기 빨리 조립해서 먼저 쏴죽이나” 장면도 <출.비.여>에서 보여주는 바람에 미리 김 팍 새버렸다. 이런 씨댕)

그렇게 뭔가 뒤에 좀더 있나 기대하면서 보다가 어이없게 싹 다 죽는다, 는 결론으로 영화가 마무리지어지는데, 어쨌든 이 모든 사건들이 결국 여자 한 명 때문이었다 그런 결론으로 (그런 결론도 <출.비.여>에서 친절하게 다 설명해준 덕분에 미리 잘 알고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이거 칭찬 아니다) 영화가 끝날 때도 빙신들, 그러구 말려고 했다. 했는데… 중요한 사실 하나가 팍 떠오르면서 아항, 저 피범벅을 보면서도 왜 그리 영화가 공감이 가질 않았는지가 앞서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던 이유들보다 훨씬 명료하게 정리되어버렸던 거다. (언제나 그렇지만, 진실은 단순하고 항상 가까운 곳에!)

그것이 세번째 배우 이야기, 김영철의 내연녀 역을 맡은 신민아다. 솔직히 얘가 처음 CF 등에 얼굴을 내밀었을 때 이미지부터가 귀여운 컨셉 아니었나. (데뷔 당시 나이가 어리기도 했겠지만) 세월이 지나고 나이를 먹었어도 얘는 주인공 여동생 역할을 하면 했지 주인공급 역할을 한 적은 없었다. (주인공 누나 역할도 한 적 없다) 뭐, 조폭 두목이신 김영철이 “어린 여자를 사귄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좀 어려뵈는 배우를 일부러 골랐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멀쩡하던 사람들을 수십 명 죽어 넘어지게 할 정도로 대단한 여자라면, (뭐 그 여자가 나서서 한 것은 전혀 없지만) 그런듯 안그런듯 하면서도 상당히 요부스러운 이미지를 낼름낼름 풍겨줘야 제 맛이 아니겠냐 말이다. 싡민아가 영화에서 그렇게 보여주려고 애쓰던 뭐랄까 좀 단아하고 정갈하면서도 사실은 속에 독을 품고있는, 그래서 사람들을 쭉쭉 빨아당기는 마력을 숨기고 있는 여자, 뭐 대충 그런 모습으로 그려졌어야할 역할이 아니겠느냐 이 말이다. 그런데 젠장, 신민아는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그저 “어리게” 나올 뿐이다. 모습도 어리고, 대사 톤도 어리고, 연기도 어리다. 어리다는 말은 좀 좋게 들리니까 “철없다”로 바꿔야겠다. 그저 생각없는, 철없는 여자애가 조폭 두목인지도 모르고 얼싸구나 돈많은 남자네하면서 물었다가 아이고 저긴 젊은 남자네 하면서 바람 좀 피웠더니 난데없이 죽을 뻔한, 뭐 그런 스토리의 여자애 정도밖에 안되게 그려졌다는 말이다. 군데군데 이 여자애를 순백의 이미지로 단아한, 순결한 여자애로 보이게 하려고 감독 이하 제작진들이 무지 애를 썼다는 느낌은 조금 받았는데, 정말 저 배우가 그렇구나 라는 느낌은 눈꼽만큼도 안들었다. 아니면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죽여주게 이쁘기라도 하던가. 신민아가 그렇게 이쁜 배우냐? 물론 이쁘니까 배우 하겠지. 근데 솔직히 갸는 개성있는 외모지 전형적인 미인 얼굴은 아니지 않냐. 참 이런 말까지는 안하려고 했는데 연기 개뿔도 못하지만 차라리 김희선 데려다놨으면 그래도 조금 이해는 가겠더라. 아무튼 여자주인공이 대충 그런 수준의 여자인데도 불구하고 조폭 두목서부터 행동대장까지 줄줄이 반해서 걔 하나 때문에 죽고 죽이는 대활극을 벌여? 졸라 이해 못하겠더라 이거다. 영화에서는 나름 중요하게 보여지려고 했던 신민아의 첼로 연주 장면, 그거 보면서 나는 여고생이 엄마한테 야단맞고 하기 싫은데 억지로 연주하는 모습이 딱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병헌은 고작 그런 모습 떠올리면서 죽는다 이거지. 졸라 불쌍한 인생이다.

결론. 감독 이하 제작 스태프들이 전부 롤리타 컴플렉스에 심각하게 사로잡혀있는 것이 아니라면, 신민아에게 눈 하나 깜짝않고 남자 수십 명 잡아먹는 요부(간접적이긴 하다만… 그래서 더욱 표현이 어려운 거다) 역할을 맡긴 것은 심각한 미스캐스팅이다. 이건 한국영화 희대의 미스캐스팅인 이보희의 “엄지” 캐스팅에 필적할만한 일이라고 나름 결론내리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