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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들의 성(性)

1999년 9월 9일

어렸을 적, 마징가 제트의 승패에 울고웃던 그 시절, 우리의 머리 속에 하나의 묘한 공식이 각인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지… 무엇일까나.

마징가 제트는 쐬돌이라는 남자가 조종했고… 그 옆에서 솔직히 방해만 되는 아프로다이라는 로봇을 애리라는 여자가 조종했다… 솔직히 마징가는 아프로다이를 구하기 위해서 훨씬 열나게 싸워야되는 경우가 훨 많았던 것이다… (도와준다고 옆에서 껄렁거리지만 실상은 방해만 되는 여성캐릭터… 비단 마징가 제트에서만이 아니라 일련의 초인/로봇물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성향이다. 남성이 여성을 보호해야한다는 마초이즘의 발로일지도 모르겠다. 잠깐 옆으로 새서 얘기하자면 배트맨을 귀찮게 하는 로빈은 여성이 아닌 남성이라, 배트맨-로빈은 동성애를 상징한다는 설도 있었다) 어쨌거나 이 공식은 그레이트 마징가에서도 나타났는데 그랜다이저에서는 마치 배트맨-로빈처럼 여자가 빠지고 쇠돌이가 돌아오고 말았다…

아뭏든 남자가 조종하는 남자 로봇, 그리고 여자가 조종하는 여자로봇. 그리고 남자로봇은 여자로봇을 보호한다. 이것은 그 당시에 하나의 공식이었다. 이 공식이 무너진 것은 합체로봇이 등장하면서부터가 아닌가 싶다. 합체로봇에는 당근 서너명, 많게는 다섯명까지의 조종사가 투입된다. 이 조종팀에도 하나의 공식이 있다. 먼저 세 명일 경우 멋지고 잘생긴 주인공, 날카롭게 생기고 팀웍을 조금씩 해치는 이기적인 남자와 꽃순이 여자. 네명일 경우 듬직하고 등빨좋은 남자가 추가되며 다섯명일 경우 장난꾸러기처럼 생긴 꼬마가 추가된다. (아따 영락없는 독수리 오형제구마!!)

합체를 하는 관계로 한 로봇 안에 남녀 조종사가 동시에 들어가다보니 이 로봇이 남성이니 여성이니를 따질 수 없게 된 것이다. 가끔 적군 로봇들 중에서 늘어진 유방(…)을 내세운 여성 로봇들이 등장하기는 했지만(일일이 예를 들지는 않겠다. 말해봐야 기억하지도 못할 것이므로) 마징가 이후 아군에서 주인공 로봇의 파트너 로봇이라는 개념은 많이 사라졌다. 결과적으로 합체로봇물에 대한 인기가 “강인한 남성과 도움이 필요한 여성”이라는 개념을 어린이들에게 주입시키지는 않았지만, “남성을 도와주는 보조적 입장에서의 여성” 개념은 그대로 가지고 있는 편이었다. 왜냐하면 메인주인공은 항상 남자였으니까.

그러면, 왜 건담 이야기를 하는 글에서 합체로봇이니 슈퍼로봇이니 따위의 이야기를 늘어놓는지 궁금해하실 것이다. 본인은 마징가 제트 이후 ‘여자가 타면 여자로봇’ ‘남자가 타면 남자로봇’ ‘합체하면 남자로봇’이라는 공식에서 별로 발전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는 전제를 먼저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건담에선 여자가 남자 로봇을 탔던 것이다.

그게 뭐야? 라고 반문하실 분들이 있으시다면 위의 전제조건을 다시 읽어주시라. 정말, 건담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남자로봇에 여자가 탔다는 말을 들어보질 못했다.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난 몰랐다. 적어도 내가 알고있는 숱한 로봇들 중에서는 합체로봇이거나 조종사가 여럿인 경우가 아니라면 그런 예는 없었다.

물론 이것은 <기동전사 건담>때까지만 해도 조짐만 조금 보여줬을 뿐 본격적인 시도는 아니었다. <기동전사 건담>에서 잠시나마 세일러 마스가 건담을 조종했지만 뭐 그거야 해프닝에 가까운 일이었으니까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기동전사 건담>에서 여성 파일럿은 라라아와 세일러 두 명 뿐인데, 세일러는 전투기에 타며 라라아가 타는 모빌아마 엘메즈도 남성과 여성의 구분이 없는 기괴한 형태가 아닌가. (곡선이 강조된 측면에서는 여성의 방뎅이를 상당히 미화시킨 형태로 볼 수도 있겄지만서두)

자! 앞서 <기동전사 제타 건담>에서 무데기로 등장하는 여성 파일럿에 대한 언급을 한 바 있다. 여기서는 시작과 동시에 ‘주인공 로봇’인 건담 MK-II에 여자인 에마 씬이 탑승했다. 하지만 설정 초기에서 잠깐 (물론 나중에는 에마가 다시 파일럿이 되지만)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넘길 수 있다… 그러나 곧바로 라이라 미라 라이라라는 여성 파일럿이 가르발디라는 모빌슈트를 몰고 등장했다. 그때 본인은 가르발디의 유달리 두터운 가슴과 스커트를 연상하여 “가르발디 = 여자로봇”이라는 등식을 머리 속에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라이라가 죽자 제리드가 가르발디를 몰고 나왔다. 점점 본인의 믿음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로자미아가 갸프랑을 타고 나타났을 때도 역시 갸프랑의 가슴이 뾰족하다는 이유로 나는 갸프랑을 여자로봇이라고 우겼다. 그런데… 무대가 우주로 옮겨짐과 동시에 남성미 풀풀 넘치는 야장 게블이 다시 갸프랑을 몰고 나타났다. (아직도 나는 갸프랑을 타는 야장이 뭔가 언밸런스하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한다) 결론적으로 내가 두 모빌슈트를 여성로봇이라고 우기면서 갖다붙였던 이유는 그냥 디자인상의 우연의 일치였을 뿐, 갸프랑이나 가르발디는 여자로봇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나중에는 후반부의 주역인 시로코가 자신이 타던 모빌아마 맷사라를 여성 파일럿인 레고아에게 주었고, 갸브스레이는 남녀가 각각 한대씩 탐으로써 남자 로봇이니 여자 로봇이니의 등식은 아무 의미가 없어졌다. <기동전사 건담 0080>에서는 아예 건담의 파일럿이 여성인 크리스티나였다.(테스트파일럿이긴 했지만)

물론 아직 그 공식이 완빵으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에우고의 ‘메터스’라는 모빌슈트는 레고아 아니면 화 유이리이, 두 명의 여자만이 탑승한다. 남자들이 그냥 한번 타볼 법도 한데 죽어도 안탄다. ‘싸이코 건담’은 시리즈로 나오면서도 여자들밖에 타지 않는다. (‘큐베레이’는 한사람을 위한 전용기니까 빼자) 물론 디자인은 여성 로봇이라는 개념과 거리가 있지만 일단 여자들만 타는 로봇에 대한 개념은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라는 얘기다.

현재 로봇만화에서는, 다시 말하면 마징가 시절의 아프로다이 이후로 ‘여성적인 메카닉’은 사라졌다고 보는 게 옳다. 큐베레이나 파라스 아테네, 메터스 등이 곡선미를 중요시하여 디자인된 것은 틀림없다고 생각되지만 싸이코건담은 외관만으로는 전혀 여자가 탑승할 모양이 아니다. 결국 제작진들이 여자가 타는 로봇이니까… 라는 명제에 얽매여있지는 않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메카닉에 남녀평등의 시대가 도래한 것인가.

어쩌면 아프로다이나 비너스 에이스처럼 여성의 전형적 몸매에 유방미사일을 날려야 여자 로봇이라는 개념 자체가 낡은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현재 스크린을 수놓고 있는 수많은 로봇들이 아무리 남성적인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특히 건담 이후 대부분의 로봇이 중심부에 고추잠자리?를 갖고 있어도) 그냥 ‘중성’으로 받아들여주는게 올바른 태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어차피 로봇만화라는 것은 남자애들에게나 열광적인 스토리니까 남성위주의 스토리가 나올 수밖에…라고 치부해버리면 간단한 문제인데 그냥 심심해서 길게 주절거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