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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이 죽으면 삼국지는 끝나는가?

1998년 7월 20일



우리가 흔히 읽는 삼국지는, 제갈량이 죽고나면 갑자기 축약되는 특징을 갖고 있다. 하지만 삼국지의 시대적 배경이 서기 184년 황건적의 난부터 280년 오나라의 멸망까지 96년간의 역사라고 할 때, 제갈량이 죽는 서기 234년은 그 중간을 조금 넘는 시간대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삼국지 이야기는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죽고나면 ‘제갈량이 죽은 촉나라는 곧 멸망하고 말았으며…’ 하는 식의 해설로 이야기를 마무리짓고 있다.

사실 촉나라는 제갈량이 죽은 후 30년을 더 지탱했다. 촉한이 건국을 한 것이 221년이니까 제갈량이 살아서 촉한을 돌본 것은 겨우 13년에 불과하다. 유비가 한중왕에 오른 해(서기 219년)부터 따져도 15년이다. 유비가 유장을 물리치고 익주목이 된 해(214년)부터 따져도 20년, 유비가 삼고초려로 제갈량을 군사로 맞아들인 해(207년)로부터 따져도 27년이므로, 제갈량이 살아서 유비 가문을 돌본 해보다 제갈량이 죽은 후 유비 가문이 버틴 햇수가 더 많다는 아주 간단한 산술계산이 나온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갈량이 죽자마자 촉한은 ‘곧’ 멸망했다고 믿고 있다.

물론 삼국지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지만 어디까지나 소설이므로, 소설적 재미가 훨씬 떨어지는 후반부의 이야기를 대폭 줄여버린 것은 이해한다. 같은 50년이지만 수많은 영웅들이 엄청난 땅을 뺏고 뺏기면서 이마터지게 싸우던 50년과, 오나라는 장강 너머에 찌그러져있고 촉한의 강유, 위의 등애 둘만 땅 한줌 뺏고 뺏기면서 싸우는 50년은 엄청난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삼국지에서, 삼국이 통일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50년을 흐지부지 맺어버리는 것은 좀 그렇다.

어떤 사람은 제갈량이 죽으면서 사실상 삼국의 판세는 위나라로 기울었기 때문에 뒷 얘기를 질질 끌고나가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따지면 사실 관운장이 형주를 오에게 뺏기면서(그나마 반은 위나라에 넘겨주고) 처형당할 때 이미 촉나라의 중원 정벌은 물건너 간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관도 싸움에서 원소가 조조에게 패할 때 이미 중국의 패권은 조조에게 넘어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말이 삼국지지 엄청나게 큰 위나라에 맞서는 촉과 오는 유비의 오나라 정벌 이후 어쩔 수 없이 강력한 동맹을 맺어 그후 40여년간 칼 한 번 맞대지 않았다. 작가는 당대의 최고 지략가인 제갈량이 살아있기 때문에 혹시나 하는 기대를 독자에게 주면서 – 여기에는 사가(史家)들이 진위를 의심하는 맹획의 칠종칠금 일화가 곁들여진다 – ‘사실상’ 마무리지어진 이야기를 제갈량이 죽을 때까지 끌고나간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수많은 삼국지의 재해석이 나오면서도 제갈량이 죽은 이후에 대해서는 자세한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이상하다는 것이다.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는 유비나 조조, 관우, 제갈량에 대해서는 숱한 논란이 있었지만, 삼국지의 후반부 50년에서 실질적인 주인공인 촉한의 강유, 위의 등애, 심지어는 사마의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재해석을 접해보지 못했다. (대개 사마의에 대한 내용은 제갈량과 빗대어 다뤄지기 일쑤다) 사실 전반부 50년에서 영웅으로 등장하는 숱한 장수들에 비해서 강유나 등애, 종회, 제갈탄 등은 결코 떨어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인기가 없다는 이유로 홀대받아온 것은 무척 가슴아픈 일이다.

게다가 내가 생각하기에 더욱 억울한 것은 제갈량의 후계자 강유다. 강유는 제갈량이 잘 키워놓은 촉한을 말아먹은 사람으로까지 평가되고 있는데, 앞서 밝혔듯이 강유는 비록 깎아먹었을지언정 30년이나 촉한을 지탱했고, 강유가 일선에서 물러나자 촉한이 멸망했다는 사실을 보아도 강유가 촉한을 그렇게까지 말아먹었다는 주장은 솔직히 억울하다. 촉한의 멸망은 황제인 유선이 어리석었던 탓이 크며, 더 나아가서는 유비가 무리하게 오나라를 정벌했던 탓이 더 클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다음 글에서는 역사적으로는 촉나라를 말아먹은 호전적인 사람으로, 삼국지연의에서는 능력은 있는 것 같은데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사람으로 평가되는 강유를 재평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