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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리드 – 슬픈 안티히어로

2000년 8월 14일

잘 나가는 만화에는 주인공과 대립되는 악당 역할을 해줄 사람이 필수적이다. 또한 이런 안티-히어로는 주인공에게 떨어지지 않는 실력은 물론이고 상당한 카리스마와 인기를 겸비해야하는 것도 물론이었다. 과거 슈퍼로봇 계열에서는 아수라 백작 등이 그러하였고, 토미노 요시유키의 로봇만화들로 접어들면 주인공과 비슷해 보이는 또래의 멋있고 젊은 악당 – 프린스 하이넬, 리히텔 제독, 샤아 아즈나블 등 – 을 등장시켜 완벽한 대립 구도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기동전사 Z건담>도 이런 추세에 따라 “공식화된” 안티히어로를 첫화에 등장시켰다. 바로 금발 머리를 펑크족처럼 세운 남자, 제리드 메사말이다.

카미유와 제리드의 대립으로 시작하는 <기동전사 Z건담>의 첫 장면은 “이놈과 이놈은 앞으로 라이벌이 될 것이다”라고 독자들에게 콕 찍어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도 모자라 제리드는 카미유의 어머니를 (모르고 그랬지만) 죽이고, 카미유는 제리드의 스승이자 연인 라이라를 죽이고 친구 가그리콘을 죽였다. 나중엔 진짜 연인 마우아까지 카미유의 손에 죽었고, 이에 질세라 제리드는 카미유의 연인 포우를 죽였다. 아주 갈 데까지 가보자고 작정하고 나선 라이벌인 셈이다.

그런데, 제리드는 전작의 안티히어로 “샤아 아즈너블”과는 출발점에서부터 다른 점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제리드의 운명을 결정짓고 말았지만) 샤아는 명실공히 지온의 최고 에이스 파일럿이었고 (조니 라이덴… 마츠나카 신… 이따위 이름은 난 신경쓰지 않는다) 붉은 혜성이라는 별명에서부터 통상 자쿠의 3배의 스피드를 낸다는 붉은 자쿠까지… 전반적으로 연방군에게 위압감을 강하게 주는 존재로 설정되어있었던 반면, 제리드는 처음이나 나중이나 에우고나 액시즈에게 “위압감을 주는 존재”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자기 스스로는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긴 하지만, 건담 MK II와 Z건담을 몰면서 명실공히 에우고의 에이스 파일럿으로 자리잡은 카미유와 일대일로 맞서기에는 어딘가 급이 떨어지는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단 말이다.
또 하나, 샤아 아즈나블은 지온의 군대에 소속되어있기는 했지만 자기의 의지대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뒤에 키시리아의 암묵적인 양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단독적으로 화이트베이스를 추격했고 언제나 선작전 후보고 식이었지 명령을 받고 출격하는 입장은 아니었던 거다. 그러나 제리드는 항상 누군가의 명령을 받고 출격하지 자신이 판단해서 출격을 결정하지 않으며, (라이라의 복수를 위해서 가르발디를 몰고 나갈 때… 그때가 좀 예외긴 하구나) 명령에 복종하고 직무에 충실한 티탄즈의 군인, 부속,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리드를 대신하여 엉뚱하게 들이밀어진 이름이 “펩티머스 시로코”다. 목성에서 돌아온 싸나이 시로코는 (목성에서 돌아오면 뉴타입이 되기 쉬운가…? 샤리아브르도 그렇고…) 등장하는 방법부터 뭔가 남다르게 등장했고, 제리드처럼 티탄즈라는 단체에 소속감으로 얽매여있지도 않았다. 제리드와 비교했을 때 계급 끗발은 중위와 대위로 한 끗발밖에 안벌어지는데 시로코에게는 도고스기어라는 엄청난 전함이 주어지는 반면, 제리드는 오히려 시로코의 밑으로 들어가 시로코가 선심쓰듯 내준 갸브스레이를 타고 카미유를 죽이겠다고 날뛸 따름이었다. 샤아처럼 출발했는데, 점점 마크베만도 못한 존재감으로 떨어진 것이다.

초반 설정에서 제리드의 마지막은 어떻게 설정되어있었을까? 등장하던 당시의 상황으로 봐서는 마지막 장면에 시로코 대신 제리드의 모습이 있는 경우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기동전사 Z건담>은 개개인의 복수극 정도로 마무리지어졌을 수도 있다. 뭔가 있어보이게 하려면, 말이 번질번질한 시로코와 하만이 역시 마지막 장면에서 카미유와 맞서싸우는 것이 적격이다. 결국 폼나는 엔딩을 위해서, 그저 복수심에만 불타오르는 티탄즈의 부속품 제리드는 심지어 마지막회도 아닌 마지막회 바로 전회(49화)에서 여전히 카미유에 대한 복수심만 불태우다가 침몰하는 라디슈에 내팽개쳐지고 말았다. 최후도 참으로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그냥 직격으로 죽는 것도 아니고… 멋진 대사 한마디 남겨놓는 것도 아니고… 하필 내팽개쳐져서 죽다니… 마치 제작진이 제리드를 내팽개친 것처럼…

뭔가 해줄 거라는 기대는 있었는데, 결국엔 카미유의 앞에 고추가루 뿌리는 역할 이상도 이하도 하지 못한 불쌍한 안티히어로 제리드. 그가 에우고/카미유와 싸우는 이유에 복수심이 아닌 조금만 더 거창한 이유만 덧붙였어도 그렇게 싱겁게 팽개쳐지지는 않았을텐데. 예를 들면, 시로코가 높게 평가해준 마우아와 함께 전후의 미래를 지배하겠다는 야심에 불탔다거나 뭐 그런 것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