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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는 공을 차는 것!

2000년 10월 16일

너무도 당연한 명제로 시작을 했다. 축구는 공을 차는 것이라고? 당연하지 않아? 그럼 축구가 야구처럼 공을 던지고 (축구에서 공을 전혀 던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방망이로 치거나, 하키처럼 스틱으로 몰고나가는 경기인줄 알았어? 축구는 공을 발로 차는 스포츠라고. 이렇게 되물으실 분들 많은 거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축구는 공을 차는 것이라고 다시 한번 강조해야겠다. 왜냐고? 유감스럽게도 많은 사람들이, “축구는 골을 넣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야구도 공을 던지고 치고 달리는 스포츠이지, 안타를 치거나 삼진을 잡거나 홈런을 치는 스포츠는 아니다. 농구? 농구는 엄밀히 말하면 골을 넣는 스포츠다, 라고 말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워낙 골이 많이 나니까. 역사상 한점도 나지 않은 농구경기가 있었을까? 공식경기중에.
하지만 축구는? 야구는? 축구에서 무득점 경기는 빈번하고, 그만큼 빈번하지는 않지만 야구에서 무안타, 무득점, 무탈삼진 경기도 존재한다. 내가 이렇게 부연하지 않아도 많은 분들이 “축구는 공을 차는 것”이라는 명제에 동의할 것이라는 것, 잘안다. 이쯤에서 내 의도를 잘못 파악하고 “아무리 골이 나지 않는 경기가 있더라도 축구가 골을 넣는 경기가 아니라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는 비판이 들려올 법도 하다. 천만에!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아니다. “골이 나지 않은 경기도 축구경기다”라는 아주 단순한 말이다.

우리가 축구경기를 볼 때, 특히 득점이 나지 않은 경기를 보면 꼭 덧붙이는 말이 있다. “(선수들이) 90분 헛고생 했군.” “(관객들이) 2시간만 낭비했네” 이런 말들. 해본 적 없다고? 그렇다면 당신은 내가 분류하는 괜찮은 스포츠팬에 속하나보다. 아니라면? 뭐, 냄비팬쯤 되겠지. 국가대표 경기에나 열광하고, 우리나라 현실이 어떤지도 모르면서 축구는 이변이 많은 스포츠니까 월드컵에 나가서 정신력을 발휘하면 브라질이고 프랑스고 다 때려부술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

골이 많이 나는 경기가 재미있고 흥미진진하다. 누가 그거 모르나? 나도 0:0 경기보다 3:2 정도의 스코어가 훨씬 맘에 든다. 축구의 하이라이트가 골인데, 그 골이 없는 경기는 아무래도 맥이 빠질 수밖에. 그러나 이것은 일반론이다. 골이 없어도 충분히 재미있을 수 있다. 어떠케? 앞에서 말하지 않았나? “축구는 공을 차는 것”이라고. 선수들이 골을 못넣었다고 해서 90분동안 서있었던 것이 아니다. 90분을 쉴새없이 뛰며 공을 이리 차고 저리 패스하고 앞으로 몰고갔다 강슛을 날렸다가 했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낭비했다”고 말하는 당신도 당신이 응원하는 팀이(만약 있었다면) 날린 슛이 날아가는 순간 짜릿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고, 그것이 살짝 빗나가거나 골키퍼의 선방에 걸렸을 때 아쉬운 한숨을 내뱉었을 것이다. 반대로 당신이 응원하는 팀이 결정적인 위기를 맞았을 때 온몸이 마비되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고, 그 공격이 다행히 무위로 끝났을 때 환호하며 박수를 쳤을 것이다. 그러구서 경기가 0:0이 되면 우리는 너무나 쉽게 “시간낭비했다”라고 말해버린다.

그것은 진짜 시간낭비다. 당신이 “시간낭비다”라고 말해버리는 순간, 당신의 그 짜릿하고 초조했던 두시간은 말그대로 시간낭비가 되어버린다. 자신이 보낸 시간의 가치를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 시간은 시간낭비 이상도 이하도 아닐테니까. 그것은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우리의 정서 때문이 아닐까.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하기 위해 3천번의 실험을 했던 것도, 결국엔 전구를 발명했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쉽게 말해버리는 사람에겐, 90분동안 한 골을 넣기 위해 최선을 다해 뛰는 선수들의 노력은 간데없고 그저 “골을 못넣은 실패자”로서의 이미지만이 각인될 테니까.

지난 유로2000 축구대회에서 4강전. 네덜란드와 이탈리아가 붙었다. 나는 98 프랑스월드컵에서 우리나라를 5:0으로 꺾고 브라질과도 대등한 경기를 펼친 이후 네덜란드의 팬이다. 아주 열광적인 팬은 아니지만, 항상 정상권에 있었으면서 정상에는 한번도 서보지 못한 그 비운에 대한 연민까지 겹쳐 외국팀간 경기에서는 항상 네덜란드를 응원하는 편이다.
그런데 그날 결과는… 기억하는 분은 하겠지만, 네덜란드는 두 번의 페널티킥을 모두 실축했고, 공격은 아주 포기한 이탈리아의 카테나치오-빗장수비에 제대로 걸려들어 0:0 무승부 끝에 승부차기로 패하고 말았다. 응원하는 팀이 졌다. 그것도 아주 공격 포기하고 수비에만 전면 치중하는 더러운 플레이의 이탈리아에게 한 골도 뽑지 못하고 0:0으로 졌다. 페널티킥이라는 거저 주는 점수를 두 번이나 실축했다. 정상적이라면 “그 경기 진짜 재미없었다”라고 말하는 것이 사람의 심리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여태껏 본 축구시합 중에서 정말 재미있었던 몇 경기 중 하나로 그 네덜란드:이탈리아 전을 꼽고있다. 왜냐고? 다시 말해주지. “축구는 골을 넣는 것이 아니라 공을 차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종 문전을 위협하는 네덜란드의 창과, 절대로 문을 열어주지 않겠다는 이탈리아의 방패가 제대로 붙은 시합이었기 때문이다. 그쯤 수비를 하면 한번쯤 무기력해질만도 한데 시종일관 팽팽한 위기감을 조성하는 네덜란드의 공격력과, 그쯤 공격을 당하면 한 골쯤 내줄 법도 한데 기가 막히게 공의 길목을 차단하는 이탈리아의 수비력이, 아무리 골이 나지 않았어도 세계 최고의 기량을 맘껏 보여주었다는 것에서 충분히 만족스럽고,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경기였기 때문이다. “언제쯤 네덜란드가 골을 터뜨릴까, 언제쯤, 언제쯤…”이라는 긴장감과 기대감은 연장전에 들어가기 전까지 팽팽하게 유지되었고, 연장전에 들어가면서는 이탈리아가 승부차기에서 이길 것 같다는 묘한 예감이 들어, 이탈리아의 그림같은 수비에 집중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탈리아:네덜란드 전 이후, 역시 네덜란드 팬이 많은 한국 축구팬들로부터 수비위주의 이탈리아는 “구제불능”이라는 험한 소리까지 들어야했다. 결과적으로 프랑스에게 져서 유럽컵도 놓치고. 공을 잘 차도 골을 못넣으면 욕먹는 사회에서 우린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