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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대리일기 예순네번째

2007년 10월 28일

[봉대리의 일기]

2/25 (금) 날씨 찌뿌등…

요며칠 날씨가 좋기만 하더니
오늘은 간만에 하늘이 인상을 긋고 있다.
떫냐?
니가 떫거나 말거나 난 뭐 알바 아니고,
나도 오늘은 인상 좀 그어야 겠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사실에 결재를 들어갔다. 이게 무슨 해괴한
변고인가?
알다시피 피부장은 허리 다쳐서 자리보전하고 누워있고,
조과장은 지가 무슨 영업상무라도 되나 거래처에 간다고 아침부터
자리를 비우고 있고, (낮술하러 갔을 거다)
오과장은 모 회사에 주최하는 세미나에 참석한다고 오전에 자리를
비우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사가 지난번 피부장이 보여준 기획안을 가지고 올라오라고
전화를 한 것이다.
엉? 아무도 없는데. 내가 갖구 올라가야 되나?
황대리를 쳐다봤더니 지가 만든 기획안 아니라구 딴데 쳐다본다.
에이… 모르겠다… 그래도 내가 뚜적거렸던 문서니까 한소리라도 내가
할만 하겠지.
…라고 생각하고 이사실로 올라갔다가…
아아… 갑자기 피부장이 불쌍하고 동정심이 생겼다…
어떻게 이사라는 작자가… 기획안의 핵심은 하나도 짚어내지 못하고…
있는대로 헷소리만 지껄이고 있을 수가 있는가…
이거는 새해 신제품의 개발 컨셉입니다. 이 제품의 타겟은 20대 초반의
신세대로…
아니 글쎄 20대 초반의 신세대는 좋은데, 걔네한테 어떻게 어필을 할
꺼냐고.
네, 그래서 여기를 읽어보시면…
아 이친구 답답하네. 그렇게 책상에 앉아서 대책이랍시고 내놓지 말고,
직접 구매대상을 설문조사나 이벤트로 끌어들여서 시장 조사를 해봐야
할 거 아냐. 안그래?
……그 얘기 뒤에 다 있는데.
예 그래서 여기 뒤에 보시면 설문조사를 실시할 예정이구요…
뒤에 언제 해 아 진짜 답답하네. 당장 실시해!!!
네 썅…
보나마나… 무슨 시장조사 그딴 소리 어디서 줏어듣고… 그 소리 하고
싶어서 부른 걸꺼야…
술땡긴다 아씨…

[피부장의 일기]

2/25 (금) 날씨 한번…

분명히 내가 거시기 뭣이냐… 결재 올릴 중요문서는 나에게 결재를
맡으라고 얘기를 했거늘…
아직까지 토요일에 봉대리 한번 고개 내밀고 소식들이 없어.
아 신입사원이 인사를 왔군.
빨리 신고를 받아야 되는데…
신고는 신고고, 하여튼 결재를 내가 안하는데 회사가 돌아간단 말야?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참지 못하고 오늘은 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캄사함다 기획실 전유성임다.
캄사 좋아하네. 나 피부장이야.
예 피부장님.
조과장 바꿔.
조과장님 외근 나가셨는데요.
외근은 조까고 있네. 낮술 먹으러 갔나부지. 오과장 바꿔.
오과장님 세미나 가셨는데요.
세미나? 웃기고 앉았네. 지가 뭐 가서 들으면 알아듣기나 한다나?
그, 글쎄요.
황대리 바꿔. (죽어도 봉대리하고는 통화 안한다)
(잠시 소란) 화장실 가셨는데요.
잘한다 잘해… 보스가 없으니 사무실이 개판 오분전이로구먼…
그럼… (상당히 망설였음) 봉대리 바꿔.
봉대리님 이사님 방에 들어가셨는데요.
뭐라고! 뭐야! 무슨 사고를 쳤어!!!
아뇨, 사고를 친게 아니고요. 이사님이 전화해서 잠깐 올라와보라고
하셨는데 아무도 안계셔서 봉대리님이…
전화를 말없이 끊었다.
죽었다.
봉대리 녀석 나한테 개기듯이 이사한테 개겼다간…
당장 둘다 사표를 써야 될지도 모른다… 어허 이럴수가…
불안해서 잠도 안오네. 아아 어째 이런 일이…

SIDH’s Comment :
직장이던 어디던
사람들을 만나다보면 핵심을 못 짚는 사람들이 꼭 있다.
아무리 내가 이렇게저렇게 얘기를 해줘도 계속 같은 소리만 한다.
옛날에는 그런 사람들이 “머리가 나빠서” 그런 줄로 알았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그 사람들이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기” 때문이다.
애시당초 내가 하는 말은 귀담아듣지도 않고
아니 내 말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 통하는 것 같은 말만 쏙쏙 뽑아내서
계속 자기 하고싶은 이야기랑 연결시켜서 떠드니까
핵심은 온데간데 없고 대화는 산으로 가는 거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그 사람 주장을 바닥부터 지근지근 밟아주거나 포기하거나 둘 중 하나밖에 없다.
나는 주로 전자를 애용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