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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대리일기 아흔두번째

2008년 2월 3일

[봉대리의 일기]

4/14 (금) 몹시흐림

블랙데이다.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사무실에 잔잔한 침묵이 흘렀다.
전유성이 조용히 수화기를 들었다.
다섯개 시킬까요…?
내가 눈짓으로 지화자 씨를 가리켰다.
지화자 씨 얼른 고개를 푹숙였지만 아니라는 신호는 안보낸다.
지난 화이트데이에 사탕 세례를 받은 모주라씨는 왕따시키기로
암묵적 합의.
전유성이가 힘찬 손짓으로 번호를 눌렀다.
짱께집이죠? 여기 기획실~ 짜장 여섯~
난 곱배기…
무너져내리는 듯한 황대리의 목소리.
젠장 마누라도 있는 녀석이…
전유성이 저거는 여기저기 숱하게 뿌리고 다니는 것 같던데 별
실속은 없었나보구만.
오과장, 조과장도 말없이 모니터에 눈 꼴아박고 일하는 척 하고
있다.
창피하겠지 하기는.
점심시간에 묵묵히 짜장면을 입에 몰아넣고 있는데 느닷없이 개발팀
변대리가 나타났다.
아니 여기는 여섯입니까!!!
되게 재밌는 거 발견한 표정이다.
총무팀도 둘이고, 영업1팀도 둘이고, 영업2팀은 열명이 넘는 식구가
고작 셋밖에 안되는데 기획실은 이야~
시꺼 꺼져.
조과장이 짜장면 면발을 튀겨서 변대리를 쫓아냈다.
퇴근시간 무렵 사내 게시판에 변대리의 글이 올라왔다.
올해도 기획실 7명중 6명… 86%로 사내 1위.
이런 걸로 사내에서 경쟁을 시키냐… 아 짱난다.

[피부장의 일기]

4/14 (금) 댑따 흐림

오늘은 점심때 뭘 먹을까 한참 고민을 좀 쌔려볼까 했더니,
나한테 묻지도 않고 전유성이가 짱께를 시켜버렸다.
어 뭐야. 너 반항하는 거야?
아닙니다.
그럼 왜 나한테 묻지도 않고 짜장을 시키는 거야?
드시기 싫으세요?
아니 뭐 싫은 건 아니지만 (솔직히 짜장면 좋아한다) 그래도 임마
상사한테 물어는 봐야할 거 아냐.
오늘은 짜장면 드시는 날이니까 그냥 드십쇼.
근데 모주라 씨는 왜 짜장 안시켜?
어머 부장님 절 뭘로 보세요.
모주라 씨가 내 말에 펄쩍 뛴다.
분위기가 왜 이래?
그러고보니 작년 이맘때도 이런 분위기가 한번 조성됐던 거 같은데.
아 이 새끼들 또 무슨 장난을 치는 거야.
하여튼 사무실에 신문지 깔아놓고 짜장면을 먹고 있는데 이번에는
개발팀 변대리가 와서 뭐라고 알 수 없는 소리를 늘어놓고 간다.
뭐야. 짜장면 많이 먹기 내기 했나?
아무 소리 마시고 드시면 됩니다.
곱배기를 한입에 털어넣고 씩씩거리던 황대리가 겨우 목구멍으로
넘기면서 말했다.
이 짜식이 건방지게… 라고 말하려다가 또 지난번의 악몽같은
날라차기가 생각나서 참았다.
퇴근길에 다른 사무실 직원들이 1위 축하한다고 묘하게 웃으면서
인사까지 해주드만.
뭐야? 짜장면 많이 먹기 대회했나 진짜?
아 씨바… 배에서 짜장이 뿔어오르는지 거북스러워 죽겠네…

SIDH’s Comment :
내가 관심이 멀어진 탓일 수도 있겠지만
요즘은 옛날처럼 발렌타인데이니 화이트데이니 하는 것들이 요란스럽지 않은 거 같다.
워낙 비슷비슷한 날들이 많아져서 그런게 아닌가 싶은데.
(빼빼로데이니 뭐 그런 것들)
이 글 쓸 때만 해도 발렌타인/화이트 말고 블랙데이라는 게 막 태동기였었는데.
블랙데이는 요즘 정말 아무도 안챙겨먹는 듯.
저 때는 블랙데이 이벤트가 훨씬 거창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