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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바다

2007년 1월 9일

지리 과목을 그리 잘한 편이 아니라서인지, (하긴 뭔들 잘한 과목이 있었겠느냐마는) 아주 오랫동안 나는 “북해”가 ‘영국의 북쪽’에 있는 바다인 줄 알고 있었다. 아마 어렸을 때 영국이 무대인 소설을 읽다가 북해라는 지명이 나오니까 그냥 그렇게 믿어버렸던 것이 착각의 시초였겠지. 아마 유럽대륙의 북쪽이니까 북해라고 부르고 그쪽이 쪽수가 더 많으니까 영국은 그냥 깨갱해버린 모양인데, 예전에는 어떻게 불렀는지 알 길이 없지만(역사과목도 약하다) 지금 영국에서도 자기네 영토의 동남쪽에 있는 바다를 일컬어 북해라고 부르고 있는 모양이다.

1991년초, 미국이 쿠웨이트를 점령하고 있던 이라크에 공습을 시작하자 국내 뉴스에서는 일제히 “페르시아만 사태(또는 전쟁)”라는 자막/제목과 함께 뉴스를 내보냈었다. 그리고 얼마 후, 당시 전쟁관련 속보로 인기를 한창 얻던 CNN에서는 뉴스 관련 자막에 일제히 “War in the Gulf”라고 표시했었다. 모 신문에서 그 점을 지적하며 “현재 그 지역은 페르시아만과 아라비아만이라는 명칭을 놓고 분쟁중”이라는 기사를 썼었다. 나름 CNN에서는 명칭에 대한 중립을 지키기 위해 페르시아도 아라비아도 다 빼버리고 “만”만 남겨놓았다는 얘기다. 하여튼 그 명칭이 대충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하더니 결국 우리나라에서도 “걸프전쟁”이라는 참으로 요상한 명칭으로 정착되고 말았다. (어떤 방송에서는 그 지역을 일컬어 “걸프만”이라는 웃기지도 않은 이름을 즉석에서 지어내기도 했었고)

북해든 남해든, 페르시아만이든 아라비아만이든, 어차피 온전히 한 나라의 소유가 아닌 영토/영해라면, 나라마다 부르는 이름이 제각각인 것이 당연한 것이고 또 그 지역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나라들은 지들 맘대로 또 편하게 부르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대한민국이 외국 나가면 KOREA가 되고, 일본이 JAPAN되고, 에스파니아가 스페인 되고, USA가 미국되고, 뭐 다 그런 것이다. 동해와 일본해의 싸움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는 죽어도 동해를 일본해라고 부를 수 없는 입장이고, 일본 역시 죽어도 동해라고 부를 수 없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이게 대화와 타협의 대상이라면, 동해도 일본해도 아닌 제3의 이름으로 국제명칭을 삼는 게 옳을 수 있다. 거기까지가 상식적인 거다.

노무현이 한일정상회담에서 동해를 평화의바다로 부를 것을 “전격제안”했다고 사방에서 난리가 났다. 요 바로 위까지 내가 쓴 글에 대해 큰 틀에서 동의하는 사람도,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아무리 그렇다해도, 한 나라를 대표하는 대통령이 ‘동해’라는 이름을 그렇게 쉽게 포기하면 안되는 것 아닌가.”라고. 대통령, 그렇지. 대통령 같지도 않다고 욕하다가도 또 이럴 때는 대통령이지. 뭐 그거야 그렇다 치고, 정말 대통령은 그런 소리 하면 안되나. 글쎄, 일단 공식적인 제안은 아니라고 청와대에서 밝혔고, 어차피 제3국에서 부르는 이름을 정하자는 거라면 대통령이 제안하지 못할 것도 없다는 게 솔직한 내 생각이다.

“동해”라는 이름이 국제적으로 인정받기에는 좀 애매하다는 주장도 사실 있었다. 우리나라 입장에서야 우리나라 동쪽이니까 동해, 즉 우리의 주체적인 이름이라고 혼자 자위할 수도 있겠지만 옛날의 나처럼 북해가 왜 북해인지 모르는 사람이 지금도 수두룩할텐데, 직접적으로(일본해처럼) 나라 이름을 넣는 게 아니라면 그런 이름을 국제적 지명으로 고집할 이유가 굳이 있겠나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일본은 일본해가 아닌 다른 어떤 이름도 수용할 수 없다는 기본적 입장을 갖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동해의 명칭 문제에 대해서 우리나라와 일본이 갖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입장의 차이가 여기에서 출발한다고 보는 거다. 막말로,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동해를 전세계적으로 “일본해”라고만 부르지 않으면 성공하는 거다. 아닌가?

그런 사고의 연장선상에서 보면, 노무현이 이번에 (사실 이번도 아니고 한 몇 달 된 얘기던데) 제안(?)했다는 “평화의 바다”는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그러나 일본 입장에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던 거다. “니네들도 이 정도 수준으로 뭔갈 내놔라”라는 차원에서 예를 든 것이라는 게 청와대 해명인데, 그런 개념에서 내놓을 수도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일본에서 당장 오케이할리가 없는 제안이라는 점에서 더욱.

우리나라가 동해라고 부르지 않으면 당장 독도가 일본에 넘어가고 동해바다도 다 일본 것이 된다고 생각하는 찌질이들한테는 솔직히 할 말 없다. 오히려 그렇게 피똥싸는 애국자들한테 해줄 말은 따로 있다. 어렸을 때 국제스포츠경기를 보면, 우리나라 유니폼은 (지금까지도) 항상 KOREA였다. 그런데 이웃 일본만 해도, JAPAN이 아닌 NIPPON을 유니폼에 새기고 나오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아시다시피 NIPPON은 日本의 일본식 발음. 국제적인 것과 아무 상관없는 지네들 말이다. 일본말고도 지금은 없지만 소련의 경우, USSR이 아니라 CCCP로 나라 이름을 표기하는 게 정석이었다. (하긴 소련이 영어식 표기법을 쓰는 게 더 이상하겠지만) 우리나라도 월드컵 이후 “대한민국” 국호가 제법 알려졌을텐데, KOREA대신 제대로 된 우리 국가 이름을 유니폼에 새기고 나갈 생각들은 해봤는지 모르겠다. 안해봤을 거다. 또 이럴 때는 “국제적으로 알려진 명칭” 운운하며 꼬리를 내리는 게 저런 찌질이들의 습성이거든.

새벽에 괜히 주절주절 말이 많은
시대가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