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모르면 바보 취급 당하는 시절이 있었다. 아니, 아직은 섣불리 ‘있었다’라는 과거형을 쓰기가 좀 그렇다. 물론 한창때보다야 많이 식었지만 에반게리온이라는 이름이 풍기는 느낌은 아직 강렬하다.
건담 사이트를 만들고나서 받은 메일 중 40% 정도는 “나도 올드 건담팬이다. 반갑다”였고, 역시 40% 정도는 “케케묵은 옛날 건담은 흥미없다. 건담 윙/또는 08소대나 다뤄달라”는 내용이었다. 나머지 20%는? “에반게리온이 짱이다”였다.
그래, 남의 홈페이지에 와서 헷소리나 하고 가는 사람들을 욕하기 전에 에반게리온부터 씹어봐야겠다. 정말 에반게리온이 짱인가? 공교롭게도 에반게리온 열풍이 몰아치던 해에 나는 대학교 4학년이었다. 졸업작품전 준비로 눈이 코인지 코가 눈인지 모르고 1학기를 보냈고, 그게 끝나자 이번엔 취업에 목숨 걸어야 했다. 그때 대학마다 에반게리온 극장판을 어디선가 구해서 여기저기 상영을 했었는데도 불구하고 본인은 위와 같은 사정상 그것을 보지못했다는 상황을 설명하려는 거다. 물론 소문은 무성하게 들었다. 아무래도 작품을 보지 않아 조금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씨네 21>같은 잡지에 실린 관련기사나 홈페이지들도 제법 살펴보았다.
그런데 뭐… 잡지야 내 머리 탓이니까 이해를 잘 못할 수도 있다 치지만, 홈페이지마다 해설이라고 달아놓은 글들을 읽으면서 나는 과연 이 홈페이지를 만든 사람이 이 내용을 전부 이해하고 글을 올렸을까?라는 의구심이 마구마구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단지 글을 쓴 사람이 글을 못썼기 때문이라고 치부해버리기에는 말의 앞뒤가 안맞는 글이 너무 많고, 통신에서 떠도는 내용을 그냥 퍼왔는지 몇몇 홈페이지는 해설서가 토씨 하나 안틀리고 똑같은 경우도 있었으며, 영문을 번역도 안하고 그대로 올려놓은 곳도 있는가 하면 딱 읽어보니 일본어를 어설프게 번역한 문체임이 확실한 글도 있었다. (어케 아냐고? 본인 일본어 조금 공부해서 일본어의 특징을 조금 안다. 믿어라)
작품을 완전히 보지 않은 상태에서 작품을 단정짓기는 미안하지만 내가 접한 평론과 정보만으로 나는 에반게리온을 평가절하한다. 여기서 분명히 밝히고 싶은 것은 내가 접한 평론과 정보라는 것이 거의 하나같이 에반게리온에 호의적이었다는 점이다. 그 중에 에반게리온을 그나마 비판했다고 말할 수 있는 글은 딱 한 편밖에 없었다. 에반게리온이 반기독교적이라고 비판한 것을 보아 아마 기독교인이 쓴 것 같던데 본인은 에반게리온이 반기독교적이라는 이유로 평가절하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 글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다. 즉 내가 에반게리온을 평가절하하는데 있어서 나에게 영향을 준 평론이나 정보는 없었다는 말이다.
그럼 네가 뭔데 남들 다 좋다는 에반게리온을 평가절하하느냐? 무지허니 좋은 질문이다. 그런데 여기는 건담에 관한 글을 주절거리는 공간이므로, 이 글은 에반게리온을 깎아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건담과 비교하기 위한 글임을 분명히 밝혀두자. 결국 평가절하라는 것은 건담에 비교한 상대적 개념이다. 그러면 뭐가 그렇게 떨어진다는 거냐고 반문하겠지. 그렇다면 반문을 함 해보자. 왜들 그렇게 에반게리온, 에반게리온 떠들어대는 건가?
문화평론가라는 김 모씨는 (본인은 이 사람이 태권브이에 대해서 씨부린 글을 읽고난 후부터 매우 가소롭게 보고 있다) 에반게리온의 인기가 일본의 입시지옥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지나치게 독창적인 글을 쓴 바가 있는데 이렇게 말이 되거나 말거나 열심히 자기 주장을 펼치는 사람은 상줘야된다. 일반적으로는 에반게리온이 기독교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신과 인류라는 댑따 철학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고들 얘기하고 있다. 아담이니 릴리스니 사도(천사)니 이브니… 또 적군인 사도는 천사의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아군인 에바는 악마의 형상을 하고있다는 둥… 사도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며 롱기누스의 창이 어쩌고 사해문서가 어쩌고 또 세피롯의 나무가 어쩌고… A.T.필드는 인간의 마음의 벽이고 인류보완계획은 인류의 진정한 진화를 꿈꾼다나 어쩌나…
무지하게 복잡하다. 그런데 죽 나열해보니까 뭔가 되게 있어보인다. 인류에 대한 지극한 통찰도 있는 것 같고 신화와 접목한 스토리도 심오해보인다. 그런데 내가 파악한 문제는 그저 그렇게 보이기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 까놓고 말해서 심오하지가 않다. 무엇하나 딱 뿌러지게 단정지어지지 않은 구성은 다음 에피소드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키지만 밝혀지는 진실은 관객을 점점 더 어렵게 만든다. 처음엔 몰라서 어려웠던 내용이 밝혀지면서 점점 더 어려워지는 악순환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그런 전차로 아직도, 에바가 끝난게 언젠데, 에바의 팬들은 정답을 찾아 헤매고 있다. (답을 찾은 에바팬은 당당하게 밝히고 나서주면 고맙겠다. 진심으로.) 답이 없는 시험지는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하고, 그렇다고 어렵기 때문에 대단한 시험이라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에바는 결국 그런 식 아닌가. 세상에 세피롯의 나무니 롱기누스의 창이니 하는 단어를 듣자마자 알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시청자들을 모두 신학자로 간주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시리즈가 종료된 시점에서도 줄거리가 여태 정리가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 아닌가. 왜 결함 투성이로밖에 안보이는 줄거리를 신화와 재해석으로 재포장하고 있는지 솔직히 나는 이해가 안간다.
자, 건담 이야기로 돌아가자. 건담 스토리 속에 그렇게 이해가 어려운 복잡함이 있는가. 물론 뒷배경이 되는 지온공국의 창설과정이니 스페이스노이드의 우주거주역사니를 이해해야 건담의 전체 줄거리를 파악하기 쉬운 것은 맞다. 그러나 그것은 에피소드가 진행되면서 충분히 설명이 되고 또 자세히 몰라도 줄거리를 그럭저럭 파악하는데는 문제가 없다. 지온이 독립을 위해 싸운다, 요정도만 알아도 충분히 건담을 즐길 수 있다. 무엇보다 건담 팬들 중에 아직도 답을 찾아헤매는 사람들은 없다.
그러나 에반게리온은 왜 싸우고 있는가부터 고민해가며 시청을 해야한다. 시청자들의 사고력 증진에 기여하고 있으니 훌륭한 애니메이션이라고 주장하는 정신나간 작자는 없으리라 믿는다. 사도가 쳐들어오니까 싸운다, 요정도만으로 에반게리온을 즐겨 시청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건담이 등장한 후부터 ‘리얼 로봇’이라는 개념이 도입됐다고 주장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간단하게 말해버릴 수는 없겠지만) 건담이 로봇 애니메이션에 끼친 영향은 막대하다. 그러나 에반게리온은 애니메이션에 그만큼의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앞으로 나올 로봇들이 에바처럼 ‘사악한 이미지’로 디자인되어 나올수 있을까. 그럴 일은 별루 없을 것이다. 게다가 그것말고는 에반게리온에서 “새로운 것”은 없었다. 엄청나게 잘된 포장만이 있을 뿐이다. 성경과 히브리 신화를 끌어와서 스토리를 무진장 교묘하게 짜맞춰놨는데, 그렇게 오묘하게 스토리를 짜낸 제작진의 노고를 치하할 수는 있겠으나 이미 그런 전례는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고 또한 단지 그런 이유만으로 굉장한 스토리라고 말할 수는 절대 없다. 사도와 에바가 천사와 악마의 형상을 뒤바꿔서 하고 있다는데 적군과 아군의 상식적 개념이 무너진 것은 건담이 먼저였다. 어쩌면 <볼테스 파이브>에서 켄이치와 하이넬이 형제임이 밝혀지는 마지막 장면에서 이미 무너졌는지도 모른다. 수수께끼에 싸인 스토리 전체의 전반적인 신비감, 아무로-카미유를 기반으로 삼아 좀더 자폐적으로 발전한 신지라는 캐릭터, 작품 곳곳에 숨어있는 성적인 함의들, 미소녀 미소년들의 등장과 신지와 카오루의 동성애적 묘사까지 모두 다른 애니메이션들이 시도해서 인기를 모았던 요소들이다. 유감스럽게도 현재 국내에서 (일본은 제외한다. 상황이 다르므로) 에바의 팬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에바가 열심히 모방해낸 슈퍼로봇물을 거의 접해보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처음 봤으니 대단해보이는 것 십분 이해한다. 그러나 그것들의 시작이 에바가 아니라는 점 분명히 알고 가야 한다. 다 옛날에 한번씩 울궈먹은 소재들인데 단지 이만큼 집대성 해놓은 작품이 없었을 뿐이라는 거다.
“인류보완계획은 사실상 오타쿠보완계획이었다”느니 하는 주장도 보았는데(복잡한 얘기라서 길게 설명하기 싫다. 이노무 만화는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게 없다) 사실상 오타쿠가 존재하지 않는 우리나라에서까지 그런 이유로 에반게리온이 대접받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결정적으로 오타쿠들은 보완되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뭐라고 떠들건 간에, 내가 생각하는 가장 확실한 오타쿠보완계획은 “에반게리온같은 애니메이션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만약에 이 작품을 그런 식으로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좋은 작품이라고 우기는 인간이 있다면 아가리를 부셔주겠다. 그런 사람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는 쉽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훌륭하다”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다. 이해될 수 없는 개념은 존재 가치가 없는 것 아닌가. 그것이 어려운 물리학 공식이 아닌 대중문화일 경우에는 더욱이.
에반게리온은 지금까지 존재했던 만화들의 흥행요소들을 모조리 결합해 “철저하게 계산되어진 상업만화”로 만들어졌을 뿐이다. 상업화라는 것 자체에 대해서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므로 (애니메이션 스텝들은 뭐 땅파먹고 사나? 돈벌어야지) 여러가지 논란거리들을 적재적시에 배치해서 흥행을 극대화해낸 제작진의 역량에 대해서는 치하해줄 수 있다. 그림체나 메카닉 디자인 따위는 원래가 내 관심 바깥에 있으므로 이 부분은 칭찬도 비난도 하고 싶지 않다. 사실 내가 불만스러운 것은 에바라는 작품보다는 그 작품에 휘둘려 물정 모르고 숭배하는 에바의 팬에 더 가까우니 말이다.
모 영화잡지에서 에반게리온을 칭찬한 글을 읽었다. 에반게리온이 21세기 재패니메이션의 새로운 전기가 될 것이며 천재적이고 혁명적인 작품이라고.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에반게리온은 21세기 재패니메이션의 성공 공식을 보여준 잡탕에 불과하며, 천재적일지는 모르겠으나 반혁명적인 작품이라고.
에반게리온에 대한 파고들기가 끝난 요즘 와서는 이 글의 말미대로 토미노 감독의 이데온, 미야자키 감독의 나우시카, 울트라맨 등을 절묘하게 버무린 애니메이션 취급받는 것 같더군요.
절묘하게 만든 애니메이션임은 정말 인정합니다.
시대가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