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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퍼스트 슬램덩크] 추억은 거들 뿐?

2023년 2월 13일

※ 스포일러 내용이 포함되었을 수 있습니다.

연필 스케치를 시작으로 북산고등학교 농구부 베스트 파이브가 한 명 한 명 등장할 때부터,
오십 줄에 들어서버린 왕년의 슬램덩크 팬은 무장해제하고 이 영화에 무한 칭송을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만화책 속 한 장면 한 장면, 생생하게 스크린에 그대로 펼쳐진 모습은
그 동안 머리 속으로 수도 없이 상상하고 그려왔던 그 모습과 하나도 다른 것이 없었고
오히려 상상했던 것보다 더 뛰어나고, 더 역동적인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원작자인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직접 각본을 쓰고, 직접 감독을 한 만큼,
극장판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원작자가 원했던 포인트를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연출이 이뤄져
어떻게 보면, 만화책이라는 매체의 한계에서 표현하기 어려웠던 감독의 의도를
이제서야 제대로 표현해냈다는 생각이 들었달까.

만화책에서도 같은 연출방식이었지만, 북산과 산왕의 마지막 1점을 다투는 공격 상황에서
아무런 대사나 효과음도 없이 진행되는 그 시퀀스는
사실 만화책에서도 누구나 숨을 죽이고 보게되는 장면이었지만
극장에서도 그 수많은 관객들이 모두 숨을 죽이고, 손에 땀을 쥐고, (심지어 모두가 결과를 알고 있음에도)
강백호의 마지막 점프슛의 궤적을 바라보게 만든 그 연출.
이게 만화책과 다른 연출방식이었다면 모르겠는데, 앞서 말했듯 만화책에서도 같은 연출방식이었고,
그걸 스크린에서 이렇게 그대로 그려냈다는 것, 이게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연출 성과를 단적으로 보여준 한 장면이 아닐까.

경기 장면 중간중간 송태섭의 과거 이야기가 삽입되면서 흐름이 끊길 수도 있었는데
경기로 돌아오면 순식간에 몰입시킬 수 있도록 장면 전환을 잘 해낸 부분도 있었고,
경기 장면 하나하나의 묘사 또한 정교해서, 어느새 실제 경기를 보는 것처럼 몰입해버려서
“아니 거기선 헬프를 들어가야지!”라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릴 정도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미 결과 다 알고 있는, 심지어 대사 하나하나까지 다 기억나는 그 만화를
이렇게 흠뻑 빠져서 감상하게 만든 그 연출의 힘은 최근 몇 년간 봤던 영화들 중 최고로 꼽고 싶다.

여기까지는 슬램덩크의 오랜 팬으로서 바치는 눈물의 헌사였고,
비평하는 시각에서 (오랜만에-_-) 조금 삐딱선을 타보자면,
개인적으로는 송태섭의 서사가 조금 길었다는 생각이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에 좀더 집중하고 싶어서 그런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겠는데,
이미 어떤 상황이고, 어떤 이야기인지 충분히 납득을 했는데도
송태섭의, 어머니의, 녹록치 않았던 과거 상황이 계속 반복되는 부분이
불필요하게 많지 않았나, 조금 더 줄였어도 되지 않았나 싶었고,
(신파성이 있었던 건 오히려 그렇게 나쁘지 않았음)
그게 최종적으로, 마지막 장면에서 정우성과 미국에서 만나는 장면으로 귀결되는 것은
조금 억지스럽지 않았나, 라는 느낌도 있었다.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라면,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다른 캐릭터들에 비해
송태섭이라는 캐릭터에 대해 확실히 더 애정을 갖고 있지 않았나 짐작되는 점.
슬램덩크 후속작은 끝내 나오지 않았지만, 외전 격이랄 수 있는 <피어스>라는 단편의 주인공이 이미 송태섭이었고,
(극장판에서 추가된 이야기 중 일부는 이미 <피어스>에서 소개되었던 이야기)
학창시절 단신의 포인트가드였던 이노우에 본인과 가장 닮게 묘사된 캐릭터도 송태섭이고,
다른 북산고 주전선수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이야기가 다뤄지지 못한 캐릭터도 송태섭이었기에,
이번 극장판을 통해 송태섭에게 많은 이야기를 부여하고
그만큼 기존의 산왕전 경기를 보는 시각을 풍성하게 하는 효과는 분명히 있었다고 본다.
다만, 음, 글쎄, 이미 말했듯 너무 길었다는 생각은 변함없다.

또 하나 굳이 얘기하자면, 어쨌든 독립된 하나의 영화인데
기존의 슬램덩크 팬이 아닌, 슬램덩크를 잘 모르는 어린 관객들에게는 어떤 영화였을까? 라고 묻는다면
내 생각엔 슬램덩크 기존 팬에겐 100점, 슬램덩크를 모르는 사람에겐 70~80점 정도였을 거라고 본다.

사실 원작에서의 산왕전은, 그동안 북산고 농구부의 한 명 한 명이
꾸준히 쌓아왔던 캐릭터가 대폭발하면서 수많은 이야깃거리와 감동적인 장면을 만들어낸 부분인데
(그래서 산왕전이 끝나자마자 – 팬들은 아쉬웠지만 – 만화가 끝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이 극장판은 송태섭에겐 새로운 스토리를 부여하면서 새로운 뜨거움을 연출해줬지만,
북산 골밑을 막강하게 지탱해준 든든한 채치수가 신현철이라는 거대한 벽에 부딪혀서 무너졌다가 기적적으로 일어난 모습,
독불장군 같았던 서태웅이 고교 최고의 플레이어 정우성과 맞붙으며 한 단계 성장하는 모습,
아무 것도 모르고 그저 여자 한 명에게 잘 보이려고 농구부에 들어와 어마어마한 트롤짓으로 말썽꾼 1호에 등극했다가
어느새 훌륭한 한 명의 바스켓맨이 된 강백호의 모습 등이
비록 짧게짧게 삽입된 과거 회상 장면들을 통해 어느 정도 설명을 하긴 했지만
슬램덩크를 전혀 모르는 관객에게 충분히 설명되고 감동을 주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그런 캐릭터의 스토리 하나하나가 다 소중한 것도 다 슬램덩크의 팬이니까 하는 이야기고
팬들 입장이야 그런 감동이 겹치고 겹쳐 나왔다면 이번 극장판에 100점 이상 200점도 더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지만
슬램덩크를 모르는 관객들에게는 그런 요소가 없어도, 그냥 송태섭의 서사와 영화에서 설명하는 다른 캐릭터들의 짧은 스토리,
그리고 확실하게 몰입시켜주는 농구경기 장면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인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사실 이번 극장판, 딱히 극장에서 볼 생각은 없었다가
이제 중학교 들어가는 딸내미가 친구들은 다 봤다며 자기도 보고싶다고 해서
오랜만에 딸내미 손잡고 극장가서 본 영화이기 때문.
그날 나와 같이 영화를 본 사람들 중 초등학교 고학년~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이 꽤 많았기도 하고.
(부모님과 같이 온 경우도 있었지만 친구들끼리만 온 경우도 꽤 보였음)
어떤 영화 기사에서 본 것 같은데, 말마따나 “추억은 거들 뿐” 이랄까.
좀 많이 거들어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정도로 마무리해야겠다.

슬램덩크 팬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적어도 만화책을 (애니건 실사건)영상화하는 경우에 있어서
최고의 성공사례라고 말할만한 작품인 것은 아마 틀림없는 사실 아닐까.

PS. 애비의 뒤를 이어 진성오덕의 길을 가고 있는-_- 딸내미 같은 경우,
영화가 끝나고 제일 먼저 했던 말이 “더빙판으로도 보고 싶다” 였음.
역시 “추억은 거들 뿐”이 맞는 말이었을까.
(참고로 딸내미는 한글을 뗀 이후 무조건 더빙판보다 자막판을 선호하는 편)

PPS. 영화에서 “왼손은 거들 뿐” 대사는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슬램덩크 팬이라면, 모두가 알고있는 바로 그 장면에서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그 대사를 되뇌이고 있었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