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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혈남아] 너를 잊고 나를 잊고

2000년 7월 2일

고등학교때 당시 창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로드쇼>라는 잡지를 친구에게서 정기적으로 빌려보고 있었다. (그 녀석은 정기구독, 나는 그 놈에게서 정기대여) 내가 왕가위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이 바로 이 잡지를 통해서였다. “홍콩의 뉴에이지를 선도하는 젊은 감독”이 왕가위의 이름 앞에 붙어있는 수식어였고, 마침 장국영의 은퇴(물론, 몇 년 지난 뒤에 도로 복귀했다)와 맞물려 장국영의 마지막 작품인 <아비정전>의 감독이라는 사실도 대서특필되어있었다. 일테면, “명배우 장국영이 인정한 감독” 수준의 기사였던 셈이다.

그때만 해도, 젊은 놈이 (물론 나보단 늙었지만…) 절대 썬그라스를 벗지 않는다는 똥고집을 보고 지가 무슨 이자벨 아자니인 줄 아나… (이자벨 아자니도 촬영과 상관없는 자리에선 절대 썬그라스를 벗지 않는다) 라는 생각 외에는 왕가위라는 이름에 별다른 흥미가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의 이름이 나에게 각인된 것은 <로드쇼>에서 선정한 홍콩의 80년대 10대영화에 그의 데뷔작, <몽콕하문>이 포함되었기 때문이었다. (<몽콕하문>이 무슨 영화지? 라고 묻는 분들을 위해 설명하면, 우리나라에는 <열혈남아>라는 제목으로 비디오 출시가 되었다)

그 각인된 정보로 인해 우연찮게 동네 비디오가게에서 <몽콕하문 – 열혈남아>를 빌려보았다. 솔직히 잡지에서 보지 않았다면 그 제목의 유치함에 치를 떨면서 절대 고르지 않았을 영화이지만… 좋은 영화라니까 뭐… 그런 심정이었다.

그렇게 봤는데, 유감스럽게도, 이 영화를 보면서 왕가위의 스타일에 별다른 감흥을 받지 못했다. 그냥 뭐, 다른 홍콩느와르에 비해서 좀더 우울하네… 아 우울해… 그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내 뒤통수를 날려버린 것은 죽어쓰러진 유덕화의 위로 흐른 노래였다.

“너를 잊고 나를 잊고” (그럼 죽는 마당에 잊는게 당연하지…)라는 제목의 노래로 기억하는데, 블루스 기타 계열의 슬픈 연주가 가슴에 절절이 와닿는게 장난이 아니었다. <열혈남아>와 왕가위에 열광하는 팬들에게는 죄송한 말이지만, 지금도 <열혈남아>의 줄거리는 아리까리하지만 (더욱이 <아비정전>과 뒤섞여서 더욱 헷갈린다) 이 주제곡은 뇌리에 너무 뚜렷하다.

개인적으로 드럼 비트가 강한 곡을 좋아하는데 드럼 소리도 슬프고… (드럼 슬프게 치기 어렵다. 경쾌하게 치기는 쉬워도) 평소에는 방정맞게 들리기 딱 좋은 짱께나라 말도 애절하다. 영화 속 주인공의 비극만큼이나 비장함도 묻어나오지만, 무엇보다도 이 음악이 가슴에 깊게 찔려들어온 것은 적절한 시점에서 적절한 화면과 함께 터져나왔다는 점이다. 유덕화와 장만옥의 러브씬(베드씬이 아니다…)에 겹질려 나오는 편집은 물론 주인공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고, 뒤이어 과거의 살아있었던 때의 모습을 보여주는 상투적인 편집에 다름아니지만, 어떤 음악을 깔아주느냐에 따라 용서가 되고 안되고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케이스이다.

PS. 알아낸 정보에 따르면, 최근에 나온 <열혈남아>의 DVD판에는 이 노래는 물론이고 “너는 내 가슴의 영원한 아픔” 같은 왕걸의 노래들이 다 빠져있다고 한다. 왕걸하고 저작권 협의가 잘 안된 건지 원. 하여튼 영화를 다시 봐도 그때의 감흥은 없고 생뚱맞은 음악이 깔리는 걸 듣고있자니 영 적응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