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위 열풍이 지나간 적이 있었다. 그의 영화가 개봉되는 족족 만원 사례를 일으키고, 한국의 잘나가는 영화인들이 일제히 그의 스타일을 모방해서 영화를 찍어대던 적이 있었다. 이러한 성공에 너무 기고만장했는지, 왕가위는 동성애를 소재로 <해피 투게더>란 영화를 만들었다.(동성애에 강한 거부감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제목에서부터 거부감이 강하게 느껴질 게다) 과연 아직도 보수적인 아시아의 몇 나라(한국 물론 포함!!)에서 이 영화는 상영이 금지되었다. 불법영상문화가 발달한 우리나라에서야 상영 불가가 큰 장애는 아니었지만. 하여튼 그 사건 이후 왕가위 열풍이 잠시 주춤했다고 보기 때문에 첫머리에서 과거형을 썼다.
내가 왕가위를 처음 안 것은, 스스로 별로 영화광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을 때였던(그 점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고등학교 2학년때였다. 공부하기 싫어서 공부 빼고는 뭐든지 다 하고싶었던 그 당시의 나는 한 친구놈이 매달 사서보는 로드쇼를 빼놓지 않고 빌려보는(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금전에 대해서는 지독한 데가 있는 놈이다) 열의를 갖고 있었다. 그 당시 왕가위는 젊은 신인 감독, <몽콕하문(국내 비디오 출시제목 "열혈남아")> 한 편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감독이었다. 얼마 후 장국영이 은퇴를 선언했을 때, 그가 은퇴작품으로 출연한 영화가 왕가위의 <아비정전>이라는 기사가 비중있게 다뤄졌지만 초점은 장국영이었지 왕가위가 아니었다. 물론 왕가위의 인터뷰 기사도 읽은 기억이 난다. 언제나 선글라스를 쓴다는 왕가위의 커다란 사진도 기억에 남아있다.
그때까지는 그의 영화가 어떤지, 그의 영화관이 어떤지 알지 못했다. 나중에 <열혈남아>를 보았고, <아비정전>을 보았다. 그런데 죄송하지만 줄거리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장면장면은 기억에 많이 남아있는데, 인터벌을 꽤 두고 두 편을 보았는데도 두 편의 이야기가 한데 섞여버린 것이다. <열혈남아>의 주제가가 아주 좋았던 것은 확실하고, <아비정전>에서 장국영의 맘보춤도 확실하게 기억하지만. 왜 섞여버렸을까? 결론은 간단했다. 워낙 비슷한 스토리였으니까. 물론 두 영화가 모방한 것처럼 흡사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아무 생각없이 있다보면 두 영화가 혼동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중경삼림> <동사서독> <타락천사>가 잇달아 개봉했다. 한 편도 보지 않았다. 영화도 제대로 보지 않고 한 영화인을 비평할 수 없다고 쌍심지를 돋구는 사람들이 눈에 불보듯 한데, 볼 필요가 없다. 나는 영화를 머리로 보지 않기 때문에 이 감독이 무슨 주의에 기반을 두고 어떤 형식을 추구하는지는 전혀 모른다. 그냥 보고나서 영화를 느낄 따름이다. 그런데 <열혈남아>와 <아비정전>이 나한테 대단한 혼란을 주었기 때문에 그의 영화를 또 볼 마음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열혈남아>를 보고 난 인상은 꽤 괜찮았다. <아비정전>을 보고 나서도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중경삼림>이니 <타락천사>니 새로 발표되는 영화를 소개하는 글을 보면 왕가위는 데뷔 때 했던 이야기를 아직도 되풀이하고 있다. 홍콩이라는 특수한 현실적 상황과 위치에서 방황하는 아웃사이더의 모습만 죽어라고 얘기하고 있다. 무대를 바꿔서 아닌척하며 만든 <동사서독>도 결국은 그 얘기다. 맹 고독한 사람들, 소외받는 사람들, 세상과 따로 노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떠들고 있다. 항상 킬러가 등장하고, 서로 엇갈리는 존재가 등장하고, 거기다 드라마 전개는 감각적이다. 사회 속에 매몰된 사람들이 아니라 겉도는 사람들만 항상 주축을 이루고 있다. 한두 번은 볼만하고 그렇게 나쁘다는 얘기도 아니다. 다만 이젠 지겹다.
홍콩이 변했다. 중국으로의 반환이 가장 큰 변화겠지만 앞으로도 홍콩이 어떻게 변할지는 예측불허다. 이제 왕가위도 뭔가 다른 이야기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나는 왕가위가 형편없는 감독이라거나 영화계에 존재해선 안될 암적인 존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으며, 오히려 능력있고 자기 중심이 있는 사람으로 굳게 믿고 있다. 그래서 하는 얘긴데 이젠 좀 다르게 말해보자. 왕가위의 고독은 항상 아웃사이더의 고독이었다. 이제는 사회 속에 깊게 뿌리를 내린 인사이더의 이야기를 해보는 것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