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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낭소리] 현실은 짜증

2009년 10월 14일

경로우대사상이 있는 우리나라에서 살면서 이런 말하기는 좀 뭣하지만, 나이 드신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대부분의 경우, 이야기를 나누는 경우보다는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경우지만) 많은 분들이 과거, 특히 자기가 한창 젊어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절에 집착한다는 느낌이 들어 짜증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단순히 사고방식이 과거의 의식에 머물러있다거나, 자기가 젊었던 시절이 지금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노라고 회상하는 정도는 뭐 그러시려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지 이렇게 넘길 수도 있다. 하지만 간혹 본인이 아직도 2,30대 나이의 청춘이고 현재가 1950년대나 60년대 정도 되는 줄 착각하시는 어르신들을 만나보면, 세월의 흐름과 세상의 변화를 인정하지 못하는 이상한 똥고집으로 만든 벽에 부딪히는 느낌이라 일단 짜증부터 날 수밖에 없는 거다.

영화 <워낭소리>를 보면서 내가 계속 느꼈던 것은 바로 그런 짜증이었다. 주인공(?) 할아버지는 자신의 몸이 늙었다는 것도, 자신의 소가 늙었다는 것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끊임없이 농사일을 나가고, 항상 남자보다는 현실적일 수밖에 없는 할머니는 그런 할아버지에게 끊임없이 잔소리를 해대는 것이 이 영화의 거의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할아버지와 소 사이에 맺어진 끈끈함, 우정, 사랑, 이런 걸 이야기하고, 그냥 단순한 사람들은 소가 불쌍해, 이런 이야기를 하던데, 나는 그냥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 할아버지의 고집에 짜증만 계속 날 뿐이었다. 한 10년 전부터 인터넷 게시판을 돌아다니다가 부딪혔던 수많은 노친네들을 떠올리면서 심하게 감정이입을 해버린 건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굳이 “늙어서 병든 소”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다리도 불편하고 나이도 80을 바라보는 할아버지가 굳이굳이 농사일을 나가면서 할머니에게 욕을 들어쳐먹는 광경 자체가 굉장히 불편했다는 거다.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할아버지가 소를 자기 가족처럼, 생명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모습에 감동받았다는데 솔직히 나는 그런 거 잘 못느꼈다. 그렇다고 또 다른 사람들처럼 할아버지가 소를 괴롭힌다고 생각되지도 않았다. (거기에 대고 “소는 일을 안하면 죽으니까 할아버지가 일부러 일을 시키는 것”이라고 반박하는 친구들은 참으로, 어디서 그런 감동소설을 읽고 써대시는지) 단지 할아버지는 “자신이 늙었고 소도 늙었다”라는 사실을 쉽게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고, 현실을 부정하는 자신의 믿음을 스스로 확인하기 위해 매일매일 소를 끌고 일을 나가는 것뿐이었다.

어떻게 보면, 늙은 소와 자신을 어느 정도 동일시하고 있는 것도 사실일 거다. 할아버지가 늙은 소에게 느끼는 감정이 예삿 소와 같지 않고, 가족처럼 생명처럼 느끼는 것도 어느 정도 맞을 거다. 자기 혼자 일하는 것도 아니고 새로운 젊은 소도 아니고 굳이 늙은 소를 농사일 파트너로 삼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하지만 그 감정은 자신의 파트너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라기 보단 자신의 분신 같은 존재에 대한 일종의 집착이라고 보는 쪽이 더 맞지 않을까 싶다.

할머니의 입장에서 보자. 할머니라고 그 늙은 소가 밉거나 없애버리고 싶은 존재였겠는가. 하지만 할머니가 계속해서 할아버지에게 “소를 팔아버리라”고 요구하는 것은, (들리는 말에 따르면 원래는 할머니가 말이 별로 없는 분인데 방송카메라도 오고 하니 기회다 싶어 일부러 계속 그러셨다고-_-) 사실은 할아버지가 갖고 있는 집착을 버리라는 말인 거다. 이제 그만 당신이 늙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농사일도 그만두고 편하게 좀 지내시라, 라는 말을 그런 식으로 하고 있는 거다. 할아버지와 소의 우정과 사랑에만 시선을 빼앗기면 바로 곁에서 할아버지와 소를 지켜보는 할머니의 생각과 감정을 무시하거나 간과해버리게 되는데, 그 부분을 읽어낸다면 할아버지가 소에게 우정과 사랑을 느끼는 건지 소로 대변되는 자신의 젊음과 능력에 집착을 하고 있는 건지 좀더 명확해지지 않겠나.

그렇다고 해서 사정이 이러이러한데 <워낭소리>를 보고 감동을 받았다니 이런 덜떨어진 것들, 이런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감독도 직접 이야기했다시피 원래 영화를 만든 의도 자체가 바로 그런 감동을 이끌어내려고 했던 것이 명백한 만큼, 감동받으라고 만든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는게 어찌 잘못일 수가 있겠나. 다만, 이게 정교하게 시나리오를 써서 만든 극영화가 아니라 현실을 그대로 담아낸 다큐멘터리이다보니, 감독의 촬영의도와는 다른 현실의 이미지가 화면에 담겨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소소한 현실이 쓸데없이 민감한 내 가슴에 와닿는 바람에 짜증이 나버린 거다. <워낭소리>가 극영화였다면, 감독의 의도가 이렇게 뻔뻔하게 드러나는 영화를 두고 이런 식으로 투덜거리지는 않았을 거다.

그나마 뭐, 영화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할아버지가 변화를 받아들이는 모습도 보여준 것이 좀 다행이다 싶긴 하다. (나뭇짐을 소와 나눠지고 달구지에서 내려 걷는 모습이라거나, 젊은 소에게 일을 가르치려는 모습이라거나) 하지만 들리는 말에 따르면 저 할아버지는 아직도 젊은 소와 농사일을 계속 하고 계시다니, 아직 할아버지가 세상을 온전히 받아들이신 건 아니지 싶다.

PS. 결혼하고나니 추석 연휴가 왠일로 바빠져서-_- 평소 같으면 밤마다 줄줄이 챙겨볼 추석특선영화를 거의 못챙겨보다가, (요즘 명절특선영화라고 해도 별로 볼 게 없긴 하다마는) 겨우 하나 건진 게 <워낭소리>였다. 올 초에 화제가 될 때부터 관심은 있었지만 결국 극장에서 보지는 못했는데, 생각보다 TV에서 빨리 방영한 것 같다. <적벽대전 2부> 말고는 거의 다 2008년 이전에 개봉한 영화들이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