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사건”이라고 한동안 내무반을 조용히 진동시켰던 사건이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나하고 친하게 지내던 한 달 졸병 염일병(당시 계급)이 불침번을 서고 있을 때 마침 야근을 마치고 내무반으로 올라온 나를 불러세운 것에서 비롯되었다. 염일병은 대학교에서 서예 동아리에 있었는데, 내가 특박을 나가는 기간에 마침 서예 동아리의 발표회가 명동 유네스코 회관에서 개최된다는 것이 이야기의 골자였다. 마침 특박을, 그것도 서울로 나가는 나보고 죄송하옵지만 잠시 들러서 후배에게 꽃다발이라도 전해달라기에 그러마고 했는데 이게 가만 보니 눈치가 이상했다. 자기가 보냈다고 절대 밝히지 말고, 공군 제복을 입고 가서도 안되며(공군에 입대한 자신이 시켜서 보낸 것으로 추리해낼 수도 있으므로), 꼭 어떤 아가씨의 작품에만 걸어주고 오라는 얘기였다. 이상의 사실로 미루어 나는 짜식이 여자후배를 하나 꼬실라고 하는데 동기나 선배들 눈치를 보고 있는 거로구나 하고 지레짐작을 했다.
특박을 나간 뒤 명동의 유네스코 회관을 물어물어 찾아간 나는, 전시회에 사람이 바글바글 끓고 있을 때 바람처럼 스며들어가서 이미 점찍어놓은 작품에 꽃다발만 휙 걸어놓고 나오려고 했는데, 딱 들어서는 순간 텅 빈 전시회장에서 안내요원(그러니까 서예 동아리반원)들이 나한테 일제히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이 아닌가. 무척 당황한 나는 멋지게 둘러대지 못하고 염 모군이 보내서 왔다는 말을 솔직히 털어놓고 말았다. 그러자 사람들이 아주 반가와하며 이리저리 안내를 해주기 시작했다. 게다가 내가 꽃다발을 들고 있는 것을 보자 염일병의 친구라는 사람이 “이거 모 양한테 걸어주라고 한거죠?” 라고 미리 눈치를 채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다행히(나중에 알고보니 정말 천만다행이었다) 당사자는 자리에 없었는데, 나는 솔직히 그 여학생 작품에 걸어주기로 했다며 시인을 하고, 대신 녀석이 쥐어주었던 편지만 다른 사람들 몰래 꽃다발에 끼워서 작품 옆에 붙여놓았다.
그런데 부대 복귀해서 사실대로 얘기했더니 듣는 염일병의 표정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후에는 매일 담배를 끼고살며 한숨으로 밤을 지새는 것이 아닌가. 나중에 알고보니 이 자식이 동아리 안에서 양다리 비슷하게 관계를 펼치는 모양이었다. 남녀관계란 워낙 복잡하기 때문에 자세한 경위는 모르지만 하여튼 그 바람에 염일병은 꽃다발 값도 못 건지고 그 아가씨와도 좋은 관계로 뻗어나가지 못했던 모양이다. 군대에서야 고참 체면도 있고하니 끝까지 내가 잘했다고 버텼지만 이제 와서 하는 얘긴데, 염씨,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