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에 대한 개념도 떨어지고, 언어에 대한 개념도 떨어지던 어린 시절에는 (그때는 그리스 신화를 읽어도 거기 나오는 사람들이 다 우리나라 사람들인 줄 알았었다) TV에서 영화를 틀어줄 때 양코배기들이 한국말로 대화를 나눠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었다. 나중에 대충 아 저거는 성우들이 더빙(이런 전문용어씩이나 알았겠느냐마는)을 해서 그렇구나, 라는 걸 알아버린 다음에도 이제는 익숙해져있었으니 역시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었다.
국민학교 4학년 때던가 극장에서 영화를 처음 보고 (만화영화가 아니고 영화… 당시 보았던 영화는 불후의 명작 <벤허>) 아 극장에서는 더빙을 안하고 자막을 넣는구나, 이건 또 왠 삽질이야 오히려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으니까 어지간히 TV용 영화-더빙에 익숙해져있었던 모양이다. 그 익숙함이 아직도 뇌세포 한구석에 기생하고 있는지, 영화를 제대로 즐기려면 좀 불편하더라도 자막을 감수하고 원어로 들어야 한다고 (원어를 직빵으로 알아들으면야 더 좋겠지만) 생각하고 말하고 다니면서도 더빙으로 된 영화에도 별 거부감이 없다. 간혹, 아주 간혹이지만 원어보다 더빙이 더 좋은 영화를 만나기도 하고.
영화에 대해 상당히 작가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더빙이 영화 원래의 맛을 훼손한다는 점을 적극 지적하지만, 그리고 나도 거기에 상당부분 동의하지만, 어차피 더빙도 자막도 원어를 알아듣지 못할 때 2차적인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이므로 완전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의 자막들은 (비디오판은 안그렇지만) 세로쓰기를 고집하기 때문에 글자 수의 제한이 있고, (그래서 빼먹는 대사들이 많다) 배경이 밝은 색일 때 보이지 않기 일쑤이며, 원어와 자막이 동시에 비교되기 때문에 아주 가끔 잘못된 번역을 발견할 경우 영화 내용과 아무 상관없이 쓴 웃음을 짓게 만들어주는 등, 몇몇 분명한 단점을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했던 대사의 축약 때문에 내가 극장에서 볼 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내용을 나중에 TV에서 더빙판으로 보면서 이해했던 경우도 있었다. 제법 중요한 대사인데 자막에서는 홀랑 빼먹었더라)
더빙이라는게 배우들의 연기력을 평가하는데도 엄청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 예전 <챔프>라는 영화를 TV에서 해줬을 때, 극장에서 자막으로 그 영화를 봤던 형님이 ‘극장에서 봤을 땐 리키 슈로더(꼬마) – 존 보이트(아빠)가 연기를 잘하고 페이 더너웨이(엄마)는 뭐 별로였었는데 더빙으로 보니까 페이 더너웨이가 정말 연기 잘하는 거 같네’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때 페이 더너웨이 더빙을 했던 성우가 ‘영화음악실’을 진행하시던 이선영 씨였는데… – 영화의 원래 맛을 훼손하는 건 분명 맞는 이야기다. (<비천무>도 더빙한 후 외국에서 개봉하면 제법 괜찮을 거다) 하지만 더빙판도 나름대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또 더빙을 연출하는 사람들도 영화의 원래 맛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는 점도 역시 인정해줘야 한다고 본다. 투니버스에서 방영했던 <아즈망가 대왕>의 경우, 다른 건 몰라도 ‘오사카’의 관서사투리를 어떻게 옮기느냐가 상당한 관건이었을텐데 성우 양정화 씨(이름까지 기억한다)의 부산 사투리는 꽤 잘된 선택으로 평가받았고 인기도 높았었다. (개인적으로는 비슷한 캐릭터 – 부산사투리를 쓰는 맹한 아가씨 – 를 알고 있기에 더욱 공감이 갔다는) 어렸을 때 마릴린 먼로가 나오는 영화를 보면 먼로의 목소리를 맡은 성우들이 섹시하게 보일라고(들릴라고…인가?) 오바하면서 코맹맹이 소리를 내는 게 별로 좋게 들리지 않았었는데, 어느날 먼로의 영화를 오리지날로 보다가 먼로의 원래 목소리가 그렇게 비음에 섹시함이 뚝뚝 묻어났다는 걸 알고는 야, 성우들이 그냥 캐릭터만 보고 목소리 연기를 하는게 아니라 원래 배우의 목소리도 감안하는 거구나, 하며 무릎을 친 적도 있었다.
본론을 놔두고 서론이 너무 길어졌는데… 이 정도로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자. 어제(2004-01-18) SBS에서 <러브레터>를 방영하길래 이미 여러 번 본 영화임에도 또 TV앞에 드러누웠다. (앉아서 TV 안본다) "더빙판임이 확실할" TV 방영분을, 그것도 이미 본 영화를 일부러 챙겨본 것은 위에 길게 썼던 것처럼 "더빙판에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자막으로만 보면서 (극장 개봉했을 때는 안봤고 그 전에 불법판으로 봤었다) 놓친 내용이 있지는 않았을까, 혹시 불법판이라 삭제된 장면이 있지는 않았을까, 뭐 그런 정도의 호기심도 있었지만 특히 "더빙"과 관련해서 내가 기대했던 것은 딱 두 가지였다. 첫째, 1인2역인 나카야마 미호의 목소리를 서로 다른 성우가 맡을 것인가. 둘째, <러브레터>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명대사 "오겡키데쓰카"를 뭐라고 번역할 것인가.
첫번째 문제 같은 경우, 원래 나카야마 미호가 ‘히로꼬’를 연기할 때와 ‘이쯔키’를 연기할 때 서로 다른 말투(이쯔키 쪽에서 사투리를 썼다던가…)를 써서 서로 다른 인물임이 구별되도록 했다는데, 우리나라에 들어온 불법판에서는 생소한 일본어로 듣다보니 이게 사투리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고해서 영화를 다 볼 때까지 히로꼬와 이쯔키를 구별하지 못했던 어떤 사람의 경험담도 직접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TV 더빙판에서는 서로 다른 성우가 다른 목소리로 구별을 시켜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었고,
두번째 문제 같은 경우, <러브레터>가 처음 소개됐을 때만 해도 ‘명대사’라고 하면서 ‘잘 지내나요? 나도 잘지내요’하는 식의 번역판 대사가 나돌았었다. (당시 <러브레터> 팬 홈페이지에 가보면 거의 그랬다) 일본문화가 본격적으로 개방되기 전이거나 초기였기 때문에 일본어 대사를 직접 거론한다는 문제는 정서와 좀 안맞는 부분도 분명히 있었을 거다. 하지만 거부감이 슬슬 없어지면서 어느덧 ‘잘 지내나요?’는 쑥 들어가버리더니, 여기저기서 ‘오겡키데쓰까’가 <러브레터>를 대표하는 대사로서 굳어져버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더빙을 하게 될 연출자는 과연 ‘오겡키데쓰까’를 어떻게 번역해서 들려줄지, 그 선택이 자못 궁금해졌던 것이다. (혼자만의 고민이었지만, 혹시 연출자가 ‘오겡키데쓰까’를 살리려고 자막판으로 방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었다)
어쨌거나 영화를 본 결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안보신 분들을 위해 정답(?)을 공개하자면, 첫번째로 히로꼬와 이쯔키의 성우는 서로 달랐다. 이건 뭐 거의 당연한 선택이었다고 보여지고… 두번째로 ‘오겡키데쓰카’는 이부분만 원어를 그냥 방송해버리는 과감한 선택을 해버리고 말았다. 다른 (한국말) 대사를 넣자니 이미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버린 이미지 ‘오겡키데쓰카’에 대한 부담이 너무 컸던 모양이다. 하긴, 만약 이 대사를 그냥 한국말로 바꿔넣었다면 영화를 다 본 사람 중에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도 분명 있었을 거다. "거 뭐냐, 오겡키데쓰까~ 하는 대사는 어디서 나온다는 거요?"
자막과 더빙 사이. 선택이 결코 쉽지는 않겠지만, 이번에 <러브레터>의 더빙 연출을 맡은 PD는 나름대로 고심한 흔적을 보여주고 결과물도 그럭저럭 정답에 가깝다고 보여진다. 누구신지는 모르겠으나 나처럼 더빙판에도 변태스러운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계속 골머리 썩어주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