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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 홍련] 뭐가 그리 절절하더냐

2003년 7월 21일

호러영화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무서움을 많이 타서 그렇냐고 물으신다면, 오히려 별로 무섭지가 않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게 정답쪽에 더 가깝다. “공포”같은 감정의 말단으로 심신을 피곤하게 만드는 일도 별로 즐기지 않는 편인데, 비싼 돈/시간까지 들여서 본 영화가 그다지 무섭지도 않은 경우까지 허다하니 뭐 좋다고 호러영화를 좋아하겠는가. 다만 대부분의 호러영화가 추리물의 형식을 띄거나 약간 도용해오는 경향이 있어, 국민학교때 셜록 홈즈에 매료된 이래 지금껏 버리지 못한 근성인 “범인이 누구인지”를 알아내는 재미에 빠져서 간혹 TV에서 틀어대는 호러물들을 섭렵하고는 있지만, 내 돈 내고 극장 가거나 비디오 빌려와서 일부러 심장에 부담되게 깜짝깜짝 놀라는 짓은 그리 즐기지 않는 편이다.

뭐 어렸을 때야, 많은 분들이 공감하리라 생각되지만,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구미호”, “설녀”, 이런 것들(?)이 무서워서 이불을 뒤집어 쓴 채 눈만 내놓고 보다가 정작 무서운 장면이 나올 땐 잠들어버렸던 기억도 있기는 한데, (우씨, 지금 생각해봐도 그건 정말 무서웠다) 그런 거야 뭐 어린 나이니까 훨씬 무섭게 느껴졌을 거고…(참고로 본인은 어렸을 적에 상당히 무서움을 많이 타는 어린이였다고 한다… 기억 안난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나서는 그다지 무서움이란 느낌 자체를 느껴본 적이 솔직히 말해서 없다. 놀람, 이라면 또 모를까… 중학교 2학년 때 단성사에서 <에이리언 2>를 보다가, 기지에 침입한 우주해병대원이 한 희생자의 머리를 치켜드는 순간 덜죽은(?) 희생자가 눈을 번쩍 뜨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때 효과음(객석에서 누님들이 질러대는 하이소프라노 비명소리)이 얼마나 생생했는지 간이 철렁했던 기억이 있어서, 공포영화에서 관객들을 놀래키는 주요 요소는 화면의 무서움이 아니라 객석의 아가쒸들 비명소리라는 철칙을 하나 갖고있기도 하다.
(생각해보라. 아자씨들로 득시글거리는 변두리 3류극장에서 그런 호러영화 틀어주면… 누가 그렇게 소름 쪽쪽 끼치는 비명을 질러주겠는가? 욕이나 안먹으면 다행이지)

하지만 이런 내 취향과는 무관하게, 동호회에서 가끔 영화 단관을 할 때마다 꼬박꼬박 따라다니다보니 극장에 앉아서 호러영화를 볼 기회도 몇 번 있었다. 바로 며칠 전에도 <장화, 홍련>을 보았는데, 극장에서 본 한국호러영화로는 아마 첫 빠따가 된 셈이다. 결론은? 음… 많이 놀랬다. (아따 그놈의 아가쒸 비명소리들) 귀신영화라는 측면에서만 보면 사실 많이 상투적이었는데, “이 쯤에서 귀신이 나올 것이다” 싶은 장면에서는 어김없이 나타나주고, “설마… 안나올 것 같은데 괜히 분위기만 잡네” 싶은 장면에서는 또 넘어가주고… “저기서 갑자기 나타날 거야!” 싶은 장면에서는 또 갑자기 나타나주고… 이건 절대 내가 대단한 통찰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어느 정도 귀신영화를 섭렵해본 사람이라면 대충 감으로 때려잡을 수 있을 정도로 매사가 뻔하게 진행된다는 말이다. 그러하다보니 귀신이 나온다는 사실이 반가우면 반가울까 놀랄 일은 아니었는데… 분위기만 좀 음산해지면 여지없이 객석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미리 질러보는 비명소리”에 깜짝깜짝 놀라고, 메인이벤트가 시작되면 귀신이 들어갈 때까지 계속 질러대는 비명소리에 귀가 따가울 지경이 되고나니 나중엔 성질이 날 지경이었다. (내가 소리지른다며 불평불평했더니 내 옆자리에 앉은 모씨는 눈치보느라 무서워도 숨소리도 못냈다더라… 믿거나 말거나) 특히 중간에 나오는, 한국영화에서 간만에 보는 살벌한 귀신 한 분은 매트릭스 포지션으로 붕 떠오르더니 그 상태 그대로 꽤 오래 스크린에서 버텨주셔서, 비명 지르다 지친 모 여자관객으로 하여금 “이제 그만 들어가라”라는 장탄식까지 나오게 할 정도였으니. (지도 소리지르기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장화, 홍련>이 무서우냐 무섭지 않으냐 를 논하려던 게 아닌데 이상하게 말이 그 쪽으로 흘러가버렸다. 빨리 정리하면… 일단 영화 속의 설정,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장화홍련전”을 비롯한 옛날 이야기들의 도식적인 “악녀계모상”을 비틀어놓은 점은 점수를 주고 싶다. 대개의 호러물들이 극단적인 선악구도를 만들어놓고 절대악에 의해 파괴되는 절대선… 뭐 이런 종류로 흐르기 쉬운데, (요즘은 하긴 또 안그렇군… 다양성의 시대를 맞이하야) 가정이 파멸되는 과정에서 계모는 하나의 요소일 뿐이고 사실은 피해자처럼 표현되는 두 딸들조차도 가족의 붕괴에 일조를 하고 있다는 듯한 뉘앙스… 평화롭던 가정을 어디선가 나타난 악녀 하나가 휘저어버리고 그 결과 모두 파멸한다…는 줄거리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는 말이다. (나중에 감독 인터뷰를 읽어봤는데 이 부분에 대해 언급이 없더라. 나만 오바했나보다) 계모가 이 가족들의 붕괴사태(?)에 대해서 전혀 책임이 없다는 말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모든 가족 구성원이 일련의 사태에 대해 조금씩의 책임감/죄책감을 느끼면서 벌어지게 된 비극이라는 점은 신선하고 좋았다. 좋았는데,

영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말이지, 이 영화에서 반전으로 제시되어야할 내용은 두 가지이다. 세 가지인가? (공포영화는 반전, 퍽이나 중요하다)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서 여기다 일일이 쓰질 못하니 대충 넘어가시라. (옛날 같으면 스포일러 이런 거 신경 안쓰고 할 말 다 하는데, 나이를 먹으니 맘만 약해지고…) 그런데 그 중 첫번째,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한 반전이 영화 시작 한 시간 만에 (그렇다, 시간 재고 있었다) 밝혀져 버리고, 그 뒷부분은 “어 그럼 지금까진 뭐냐?”라는 관객의 의문섞인 시선밖에 유도하지 못하는 점은, 솔직히 아쉬웠다. 마지막, 귀신이 누군지 밝혀지고 사건 다 종료되고 완전히 쫑나는 분위기 다 조성해놓고나서야 사건의 전말(요렇게 요렇게 사람들이 죽어나갔다)을 설명하기 시작하는데, 이 부분은 또 너무 늘어진다. (여자애들이라 그렇게 말이 많은 건지…) 전반부의 화려했던 공포장면(감히 화려했다는 수식어를 붙여주고 싶을 정도로, 특히나 그 매트릭스 귀신?은 참 괜찮았다)을 조금 더 늘이고, 후반부의 그 구구절절한 사연들은 좀 줄이거나 앞으로 땡겼어도 됐을 것을… 그런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