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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타건담 극장판 3부작 총평

2006년 5월 10일

아직 극장판 3부, 어쩌면 2부조차도 보지 못하신 분들께는 스포일러가 될지도 모르는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작년 동경에 가서 제타 극장판 1부를 보고 와서 썼던 총평을 다시 읽어봤다. (나이를 먹으니 머리가 나빠져서 내가 썼던 글도 잘 기억이 안난다) 확실히 1부만 봤을 때는, 수많은 건담 매니아들(특히 우주세기쪽)의 기대치에서 그리 많이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 분명했다. 아마도 그 기대치가 삐걱거리기 시작한 시점은, 극장판 2부에서 “난데없이” 포우가 죽어버린 순간부터였을 것이다. 1부에서 보여줬던 스토리의 축약은 단순히 “빠른 진행”과 “밀도있는 구성”을 위해 어느정도 필요성을 공감할 수 있었던 반면, 2부에서 포우를 죽여버린다는 설정은 그저 이야기를 단순하게 만드는 수준으로 이해하기엔 무리가 많은 설정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쓴 1부 총평에서도, 포우가 등장하는 장면은 2부에서가 마지막이 아닐까라는 예상을 적어놓긴 했었다. 어디까지나 3부의 가장 마지막 장면에서는 카미유가 홱 돌아버릴 거라는 -_- 가정하에서 해본 예상이었는데, 2부에서 포우와의 이야기를 어떻게든 완결하고, 3부에서는 올곧게 하만과 시로코, 샤아와의 대결에 집중하는 게 1,2,3부로 나눔에 있어서 효과적인 배치라는 생각이었던 거다. 뭐, 결과적으로 맞긴 맞은 셈이 됐는데… 그렇다고 킬리만자로가 완전히 빠져버리는 시나리오는… 음… 솔직히 약간 당황스러웠다. 제타건담이라는 작품에서 포우가 차지하는 위치로 볼 때 적어도 극장판 3부작 중 1부 정도는 거의 풀로 장악하는 포스를 뿜어줘야 된다는 기대치를 감안하면, 카미유와의 짧은 데이트 후 그저 카미유를 “우주로 돌려보내주는” 역할 이상도 이하도 못하고 바다 속으로 사라져버린 포우의 퇴장은 작품 전체에 미치는 영향의 측면에서 볼 때 너무 미미했던 거다. (최소한, 제목을 <연인들>이라고 지어놓은 것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라도 이건 말이 안되는 일이다)

그렇다면, 토미노 감독이 제타 극장판을 만들면서 여기저기서 했던 말 중 “결말은 TV판과 다르다”는 말의 의미가 아주 간결하고 명확해질 수 있다. (어떤 인터뷰에서는 노골적으로 밝히기도 했지만) 바로 카미유가 시로코를 죽인 뒤 미치지 않는 결말. 이 상태로 3부가 진행된다면 마지막에서 카미유가 시로코를 죽이고 미쳐버린다면 상당히 뜬금없는 결말이 된다는 사실 말이다.(물론 오랜 세월 TV판에 길들여진 매니아들이라면 안그렇겠지만) 솔직히 2부를 보기 전까지는 카미유가 미치지 않을 거다, 라는 토미노 감독의 말을 TV판 마지막 장면에 대한 해석의 차이, 즉 시로코가 죽은 뒤 카미유의 조금은 넋나간 행동을 몇몇 씬의 첨삭을 통해 좋은 쪽으로 해석하는 열린 결말을 지향하려는 것으로 생각, 아니 기대했었는데, 2부에서 포우의 조기 퇴장을 보고나서는 그런 기대가 80% 가량 줄어들어버렸다. 3부에서 어떤 장치가 추가적으로 벌어지지 않는 한, (로자미아와의 에피소드가 포우만큼의 포스를 가질 수는 없다) TV판에서의 카미유가 “전쟁이라는 극한상황에서 자신을 버텨내지 못하고 산화해버린 영혼”이었다면, 극장판에서의 카미유는 “극한상황에서 자신을 이겨내고 되돌아온 영웅”이 될 줄 알았더니, 고작 “별 역경없이 전쟁을 마무리하는 슈퍼히어로”가 될 가능성이 훨씬 높아졌던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과연, 극장판 3부에서는 로자미아는 아예 나오지도 않았고, 티탄즈로 이적(?)한 레코아와의 갈등도 표면화되지 않는다. (에마와조차도) 그 외의 내용은 대충 TV판의 큰 줄거리를 따라가는 것 같지만 심도있는 묘사는 다 놓쳐버리는, 그래서 갈등의 심화보다 이야기의 진행을 좇는다는 느낌이 훨씬 강했다. (이 시점에서 고백하는데, 내가 일본어를 지금보다 훨씬 잘한다면 전혀 다른 해석을 할 여지가 있다는 점을 밝혀둔다. 솔직히, 대사 많이 놓쳤다. 뉘앙스나 분위기로 봤을 때 지금 판단과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지만) 이렇게 진행된다면 막판의 카미유가 미쳐버린다는 설정은 20년전의 오타쿠들의 추억 속에 오롯이 묻혀버릴 가능성만 다분해지는 거다.

그리고, 결국, 아시다시피, 카미유가 일명 수박바 어택으로 불리는 웨이브라이더 돌격으로 시로코를 쓰러뜨리고나서 이야기는 완전히 새롭게 탈바꿈했다. 이미 충분히 이야기했지만, 막판 카미유의 오바(?)가 생경해보일 정도로 카미유가 마지막 전투에 혼을 쏟을만한 모티브는 거의 없다시피 했기 때문에 전투가 끝난 후 화와 대화를 나누는 카미유의 모습은 (내 심정과 상관없이)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웠다. 카미유는 미치지 않았다. 아니, 미치지 않아야 했다. TV판이 아닌 극장판에서 내내 보여진 카미유의 모습은, 전쟁이라는 극한상황에 압박당한 소년도 아니었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차례로 잃은 상처에 짓눌린 남자도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좋게 보자. 주인공이 마지막에 미쳐버린다는 설정, 솔직히 그 점에 열광해서 제타의 팬이 된 사람도 있기 때문에(일정부분 본인 포함) 그렇게 과감하게 결말을 바꿔버린 것에 불만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기왕이면 주인공이 해피엔딩으로 맺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훨씬 많을 것이다. 그렇기에 주인공이 불행하게 맺어지는 음울한 설정보다 이번 극장판의 “아무도 예상못했던”-_- 결말을 환영하는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토리가 아닌 캐릭터만을 보면 일년전쟁 시절의 아무로나 TV판에서의 카미유에 비해 극장판에서의 카미유는 임팩트가 한참 약해졌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차라리 내가 중간에 예상했던 것처럼 포우, 로자미아, 레코아 등등과 얽힌 수많은 상처를 그대로 안고 막판에 폭발시킨 카미유가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아가마로 돌아온다는 설정 정도였더라면 아바오아 쿠에서 탈출하던 아무로 정도의 이미지는 충분히 각인시킬 수 있었겠지만, 아예 여지를 없애버리려는 토미노 감독의 사전작업(이것도 몰살의 토미노?) 덕분에 카미유는 그저 전쟁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캐릭터 정도의 이미지만 남아버리고 TV판에서와 같은 알 수 없는 매력은 쏙 빠진 캐릭터가 되고 말았던 거다.

단순히 카미유의 팬이라서 카미유의 캐릭터 변화에만 민감하게 반응하느라 제타건담 극장판 전체의 장점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의문을 한번 스스로 던져봤다. 아니다. 전체적으로 축약된 이야기 탓인지 제타건담 극장판을 통털어서 캐릭터가 살아있는 인물은 그리 많지 않다. TV판에서 지휘관과 파일럿으로서 양분된 역할을 담당하는 바람에 위험한 줄타기를 하던 샤아는 그냥 파일럿처럼 보이고, (일부 극장판을 감상하신 분들이 샤아가 개그화되었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론 그렇게까지 보이지는 않고…) 어떻게 보면 제타건담의 스토리에서 상당한 축을 담당해야할 레코아는 2부까지는 몰라도 3부에서는 영 어영부영이다. 찌질캐릭터로 악명을 높였던(?) 카츠는 찌질해질 틈도 없이 바위에 들이박아버리고, 라스트 보스 역할을 담당해야할 시로코도 에피소드가 상당부분 삭제되면서 후까시맨 정도(하긴, TV판에서도 그 정도이긴 했지만)로밖에 안보인다. 내가 다른 글에서도 언급했던 불운한 안티히어로 제리드 메사는 아예 존재감 상실, 극장판 막판의 야장 대활약은 앞뒤 연결 부족으로 대단히 뜬금없어보인다. 1부와 2부에서 제법 강렬한 인상을 남긴 아무로가 TV판보다 좀 나아보인 정도였고, 그 외에는 캐릭터가 살아있다고 느낄만한 인물이 극장판을 탈탈 털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 글을 통해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쉽게 말하면, 20년이나 지난 작품을 극장판으로 리메이크하면서 신작화 좀 넣고 원작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결말 조금 수정하는 정도로밖에 신경을 쓰지 않은 거 아니냔 말이다. 기존 작품에 대한 새로운 해석, 새로운 시각 같은 것은 아예 없다. 인터넷에 도는 말마따나 (볼거리에 치중한) 고도의 낚시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것이 이번에 등장한 제타건담 극장판 3부작의 냉정한 현실이다.

어쩌면 원래부터가, 대하소설에 가까운 수많은 갈등구조로 얽혀버린 제타건담 TV판을 4.5시간짜리 극장판에 우겨넣는다는 것이 무리였을지도 모른다. 애시당초 다른 팬들처럼 신작화에나 열광할 것을, 괜히 무리한 기대를 한 내가 바보였던 것인지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