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일요일 낮 12시가 되면 우리집에서는 총성없는 전쟁(?)이 벌어지곤 하였다. KBS 1TV에서 방송하는 <전국노래자랑>을 보시려는 아버지와, <출발! 비디오여행>을 보려는 형 또는 나와의 리모콘 쟁탈전을 말하는 것인데, 이게 뭐 노골적으로 이거 보자 저거 보자 공방이 오가는 정도는 아니었고 그냥 리모콘 먼저 잡는 사람이 틀어놓은 채널을 말없이 보는 식이었다. (물론, 내가 틀어놓은 <출발! 비디오여행>이 조금이라도 재미없을라 치면 아버지는 가차없이 내 손에서 리모콘을 뺏어 <전국노래자랑>으로 돌려버리곤 하셨다)
<전국노래자랑>에 비할 만큼은 아니지만 만만치않은 장수프로그램 <출발! 비디오여행>은, 프로그램 제목처럼 처음에는 순수하게 “비디오 영화”에 대한 소개를 위주로 해왔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아마 그무렵 서서히 시장이 형성되고 있던 “비디오대여업”에 발맞춰 생겨난 프로그램이 아니었을까 생각되는데, (쉽게 말해서 이런 거다. 일요일에는 비디오 한편 빌려보셔~ 우리가 어드바이스를 해줄랑께~) 간판 코너였던 “전창걸의 영화 vs 영화”에서도 개봉한 지 오래된 명작이나 숨어있는 영화들(국내에 개봉못한 영화들)을 소개하면서 단순히 영화 소개가 아니라 영화에 대한 지식도 얻을 수 있었던, 그런 코너였던 생각이 난다.
그러다가, 아마 98~99년 정도부터가 아닌가 싶은데, <출발! 비디오여행>이라는 제목이 무색하게 서서히 이 프로그램에 “극장개봉 직전의 영화”들이 소개되기 시작했다. 물론 그것도 처음에는 누구나 눈깔빠지게 기다리던 화제작들보다는, 작품성 있고 영화적 재미가 탄탄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널리 홍보되지 못했던 영화들을 다뤄주곤 했다. (브라질 영화 <중앙역>을 바로 이 프로그램에서 소개해주는 바람에 극장에서 봤으니까) 그런데 “뜰까?”라는 제목의 코너가 생겨나면서, 점점 개봉예정영화의 노골적인 홍보장이 되버리더니, 나중에는 “숨겨진 명작” “놓치면 아쉬운 개봉영화” 등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신문-잡지 등에서 충분히 떠들어대고 되풀이되풀이 홍보해대서 이름을 듣는 것조차 지긋지긋한 영화들로만 내용이 꽉꽉 들어차기 시작했다. 전창걸이 빠져나간 이후 “영화 vs 영화”는 영화 선정 이유도 유치하기 짝이 없는, 그냥 개봉예정 화제작과 그 영화랑 어거지로 엮은 비디오 출시영화 두 편을 번갈아 소개하면서 주요장면 다 보여주는 코너로 전락해버렸고, “뜰까?”에서는 <비천무> 같은 영화도 서슴없이 좋은 영화니까 꼭 가서 보라고 권유하는 만행(?)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언제부턴가 나도 <전국노래자랑>을 보기 시작했다.
<출발! 비디오여행>이 잠깐, 반짝 내 눈을 끌었던 적이 있기는 있었는데, 옛날 딴지일보에서 영화평 쓰던 한동원 데려다가 대본 쓰게 하고 성우 이철용이 나레이션하는 <결정적장면>이라는 코너를 만들어 방영했던 시기였다. 개봉 영화 위주로 흐르지도 않았고 영화 속에서 널리 알려진 명장면에만 집착하지도 않아서 (그런 측면에서 <스타워즈 5 – 제국의 역습>에서 ‘내가 니 애비다’를 꼽았던 점은 좀 실망이었다) 그런데로 재미있게 볼 수 있었던 코너였는데, 소재가 많이 부족했는지 아니면 영화 홍보사의 로비에 밀렸는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고, 나는 다시 <전국노래자랑>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다가 얼마전, <출발! 비디오여행>이 과도한 영화 홍보로 -_- 경고 조치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꼴좋다, 는 생각이 솔직히 들더라. 아울러 이번 일을 계기로 니들 좀 각성하고 초심으로 돌아가라… 그런 생각도 얼핏 들긴 했지만.
그리고 어제, 2003년 11월 23일, 우연찮게 <출발! 비디오여행>으로 채널이 고정되고 말았다. (아버지가 오랜만에 집에 안계셨다) 죽 보니 “영화 vs 영화”는 여전히 억지스러웠지만, 극장상영은 옛날에 끝나고 비디오로 출시됐거나 이미 됐을 <터미네이터3>와 <나쁜 녀석들2>를 집어내서 보여주고 있었다. 이어 나오는 영화들도 <니모를 찾아서>나 <시카고>처럼… 개봉예정영화가 아니라 비디오 출시 예정 영화 소개로 방향이 확 달라져 있었다.
뭐, 솔직한 심정은 예전보다는 그게 더 나았다는 점이다. 개봉영화 홍보나 비디오출시영화 홍보나 그게 그거일지 몰라도, 최소한 <출발! 비디오여행>이라는 제목에는 충실해진 구성 아니련가. 영화 선택에 비해서 내용 구성에서는 예전보다 결코 나아진 점이 없었지만, 경고 조치에 이은 이 작은 변화를 나는 소중하게 받아들이려고 한다. 다음번 우연찮게 채널을 고정시켰을 때는 내용구성에서도 나를 실망시켜주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이제 <전국노래자랑>도 지겹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