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대리의 일기]
12/13 (월) 날씨는 좋은데 좀 춥네…
이사님이 부친이 위독하시다며 내려가신지 일주일이 지났다.
병환이 차도가 있으신 편인지 오늘 이사님이 출근하셨다.
며칠 밤을 샜다던데 아침에 우연히 마주친 이사님 얼굴이 핼쓱해보인다.
저 인간도 피 부장만큼 재수없기는 하지만 잘 보여둬서 나쁠 건 없지.
마주치자마자 인사를 넙죽 했더니 꽤 반가운 표정이었다.
어 봉대리… 일주일간 회사에 별일 없었지?
(너 없으니까 결재 편하고 잘만 돌아가더라…)
어유 이사님이 안계셔서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돌아가긴
했습니다…
어어 그랬겠지… 수고해 봉대리… 참 난 자네 성이 특이해서 잊어먹기가 힘들단
말야…
그 바람에 피 부장한테 찍힌 거야 씁쌔야.
봉씨 성도 희성인데 그걸 역시 희성인 피씨 밑에 붙여놔?
남들이 우리 팀보고 요상한 성씨들이 모여서 요상한 짓만 한다고 쑤근거리잖아…
하여튼 이사님이 돌아왔으니… 잠시의 행복은 끝나고 다시 퍽퍽한 회사 생활이 시작
되겠구먼…
피 부장 말끝마다 이사님 이사님 들먹거리면서 우리 갈구는 거… 우리한테 자기
위신이 당당하지 못하니까 맨날 이사님 들먹거리는 거 다 아는데… 한 일주일 편하다
했드만 다시 그 소리 듣게 생겼으니…
아니나다를까 아침부터 황 대리 무지하게 작살나드만…
일주일 전에 이사님이 변고를 당하지 않았음 내가 저 꼴날 뻔 했잖아?
인생만사 새옹지마더라…
[피 부장의 일기]
12/13 (월) 더러운 날씨…
아침에 이사님이 출근한다는 특보를 접하고 부랴부랴 회사로 나왔다.
이사님 부친께서 다행히 위기는 넘기셔서 (역시 아파도 돈많은 자식 놔두고 아파야
된다. 돈 쳐바르니까 죽을 사람도 살아나잖아) 어제 저녁에 올라오셨단다.
그동안 업무 공백…이래봤자 결재칸에 사인 하나 비어있는 거밖에 없지만, 그래도
공석기간 업무보고를 하려면 일찌감치 나와서 자리를 지켜야겠기에 서둘러 나오기는
했다.
참 그동안 편하기는 댑따 편했는데… 아그들한테 쓸데없이 이사 핑계 안대서 좋고…
전자결재 전자결재 사장 이하 간부들이 죄다 외침에도 불구하고 울 이사만 나는 눈이
나빠서 컴퓨터를 오래 노려보면 눈깔이 아파와… 라는 말같잖은 핑계로 수기결재를
고집하기 때문에 결재서류도 두 부 작성해야 되고… 아 진짜 돌아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나저나 안좋은 일도 당할 뻔 하고 했으니까 성질머리는 좀 죽어서 왔을라나.
왠걸.
먼젓번에 황대리 -> 봉대리로 이어졌던 그 경쟁사 비교건… 잊어먹구 있었을 거라고
지레짐작하고 있었더니 앉자마자 그거부터 따지는데…
말 그대로 폭격을 맞은 기분이었다… 아 쒸바… 이 호기를 살려서 봉대리를 잡아
족쳤어야 했건만 지난 번에 황대리 금연사건이 있었을 때 그 보고서를 은근슬쩍
황대리한테 넘겨버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황대리를 작살내야했다…
짜식이 담배 끊는다는 소리만 안했으면 오늘 봉대리를 초죽음을 만들 수 있었는데…
아깝다 씨불.
게다가 그동안 자기 몰래 (누굴 도둑놈 취급하나. 몰래라니. 공석이니까 그냥 올린
건데. 그럼 그 꼴짜기까지 서류 들고 결재받으러 가리?) 올린 서류들 죄다 가져와서
다시 결재 맡으란다. 뭡니까 이거. 그동안 전자결재로 슝슝 잘 올라간 서류들을
전부 취소시켜 내려와서 A4지에 출력해서 또 들고 들어가라고?
이 인간이 수기결재를 선호하는 이유를 나는 안다. 앞에 세워놓고 깨부수는 맛. 그걸
즐기는 새디스트가 틀림없다.
이 인간하고 몇 년 살다보니 나도 많이 닮아가기는 했지만…
1999년… 요때만 해도 전자결재시스템이라는게 (카드긁는 인터넷결제를 말하는게 아니다) 많이 생소할 때였는데
첫 사회생활을 그래도 대기업에 한 탓에 요즘식으로 말하면 그룹웨어도 만져보고, 전자결재라는 것도 해보고, 그랬었다.
문제는 그 시스템을 이용해서 결재를 해주셔야할 분들이 수기결재를 더 선호하시더라는 것.
그러면서도 컴퓨터는 사무실에서 가장 좋은 거 쓰시는 분들이 또 그분들이지.
지금도 기억나는 건 컴퓨터 안된다고 연락와서 고쳐드리려고 가보면
이렇게 높은 분들 PC 배경화면은 거의 예외없이 수영복입은 젊은 처자 사진이더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