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대리의 일기]
12/29 (수) 맑음
우리 회사는 매년 말일 승진자가 발표된다.
드럽게 특별한 일이 없으면 년중에 승진하는 경우는 없으므로
일년에 딱 한번 회사에 초긴장상태가 유지된다고나 할까.
어차피 내가 벌써 과장 승진 대상자는 아니니까 뭐 내후년까지는
그런 걱정(?) 안하고 살 수 있는데,
우리 팀에서 대리 고참급인 오대리는 이번에 과장 승진 케이스라
아무래도 신경이 많이 쓰이는 모양이다.
인사팀 김대리한테 은근슬쩍 뇌물도 찔러보고 그러던데…
어차피 인사결과야 위에서 알아서 하는 거지만 괜히 궁금하니까 미리
좀 어떻게 알 수 없겠느냐 그런 차원이겠지만
워낙이 순탄하게 대리로 승진한 탓인지 승진 문제 갖구 저렇게 벌렁
벌렁거리는 게 별루 좋아보이지가 않는다.
그래도 기획실에 피부장 밑으로는 평생 차장으로 승진 못할 거라는
조과장밖에 없으니… 이 참에 과장 한 명 더 생겨도 팀에 나쁠 거야
없겠지…
조과장은 과장 승진하고 축하술을 너무 많이 먹어서 다음날 사장한테
인사하러 들어갔다가 오바이트를 쏟아버린 화려한 전적이 있어서…
절대 차장 승진 못할 거라는 게 회사내 중론이다…
차라리 다른 회사로 옮겨가지 말야…
술이 웬수야 조과장은 하여튼…
연차로 따지면 작년 1월에 차장 승진했어야 되는데 말이지…
소문이 워낙 나쁘게 나서 경쟁사에서도 별로 손을 안내민다던데…
어쨌든 피부장도 오대리 승진에 나서서 뛰는 모양이니… 이틀 뒤에
결과가 좋았음 좋겠네.
그래야 술이라도 얻어먹지…
[피 부장의 일기]
12/29 (수) 맑았던가? 일기에서 날씨 쓰는 칸 빼버렸음 좋겠어.
1999년을 화려하게 수놓았던 호피무늬코트… 이름하여 옷로비사건.
이 사건을 뽄따서 “몸로비사건”이라는 에로비디오가 출시될
예정이라는데…
집 앞에 화끈비디오방에 전화해서 나오는 즉시 예약해놓으라고 해야
겠군.
아니지 이런 얘기 할려는게 아니었는데.
언제부턴가 밑에 데리구 있는 놈들 승진 못하는 건 팀장의 무능함으로
직결되는 별 개떼같은 분위기가 형성이 되는 바람에…
별로 이뿌지도 않은 오대리.. 그놈 과장 승진하는 걸 내가 왜 로비를
하고 댕겨야 되나 말야…
암튼 12월 내내 인사팀이나 이사님한테 오대리 앞세워서 인사
시키느라 일도 제대로 못한 기분이네…
나도 옷로비가 안되면 몸로비라도 할 걸 그랬나…
임원 중에 여자가 있었으면 내 한 몸 바쳐가며 몸로비를…
할 수도 있었는데 임원진에는 여자는 커녕 죄다 늙은 할아버지들
투성이라…
내년에는 새천년도 열리는데… 노조위원장한테… 남녀평등
실현을 위해 임원진에 여성을 스카웃하자는 주장을 펴라고 함 꼬드겨
볼까…
몸로비… 으흐흐흐흐…
…일기가 첫머리가 이상해지면 계속 그 분위기라니까…
어쨌든 결론적으로, 오늘 인사팀장 만나서 은근슬쩍 오대리 이야기를
꺼내봤더니… 좋은 결과가 있을 겜다… 그러더군…
그럼 그렇지… 내가 얼마나 신경을 많이 쓴 일인데…
그나저나 이젠 과장이라 함부로 대하기도 그렇네.
대리일 적에는 내 차 주차시키는거… 그런거 막 시켜먹었는데…
어찌된 회사가 팀원 중에 운전면허 가진 인간이 오대리 하나 뿐이야
썅…
봉대리 초보라 불안하고… 황대리 장롱면허고… 있으나마나한
것들…
내 니그들 승진할 때… 오대리만큼 뛰어댕기나 보자…
아니지.. 그때까지 이놈들을 안고있을 이유가 없지…
니가 죽거나 내가 죽거나… 내년에는 결단을 내버려야지…
10년을 직장생활하면서
승진이라는 걸 딱 한 번 해봤다.
그렇다고 직급이 여태 그모냥 그꼴이냐? 그건 아니고
회사를 옮겨다니면서 직급을 전 직장보다 하나 올라가고… 뭐 그런 식이었던 건데
그래서그런지몰라도 직장인들이 꽤 목을 매는 일 중 하나인
“승진”이라는 것에 대단히 무덤덤한 편이다.
아무래도 옛날처럼 직급/호봉제가 아니라 연봉제로 바뀌면서
승진에 굳이 목을 맬 필요가 없어진 사회변화탓도 있겠지만
남한테 어떻게 불리거나 어떻게 대접받는 거에 무덤덤한 편인 성격탓도 좀 있을듯.
지금 우리 회사는 실장이 팀장보다 낮은 이상한 체계의 회사라서
당분간 무덤덤한 상태는 계속 될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