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대리의 일기]
1/26 (수) 오늘도 맑고… 추움….
새양복을 꺼내 입었다.
백여명이나 되는 신입사원 앞에서 강의를 할 몸인데 뭔가
삐까번쩍해보여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
그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고.
평소 출근시각보다 조금 이르게 나왔다. 연수원이 집까지 좀 멀어서.
버스 안에서 그럭저럭 괜찮게 생긴 아가씨와 철썩 달라붙어오는
흐물흐물함까지 느낄 수 있었다. 흐흐흐…
역시 만원버스는 가끔 타줄만 하거든.
만원버스 안에서 조금 구겨진 옷매무새를 바로 하고 연수원으로
들어섰다.
나를 아는 연수원 대리 하나가 나를 보더니 찌그러지는 표정을 짓는다.
기획실에 한명 와달라고 한 게 자네였나?
나라니까.
그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벽에다 머리를 짓찧는건 무슨 이유일까.
하여튼 녀석의 손에 이끌려 교육장으로 들어갔다.
으아~ 사람 졸라 많구만~
워낙 멍석깔아주면 잘 노는 체질이라 큰목소리로 인사부터 했다.
안녕하십니까 기획실 봉달중 대리입니다~
예상은 했지만 이름부터 일단 분위기를 휘어잡을 수 있는터라,
교육장에 조용히 웃음이 번져나가더니 결국 큰 폭소로 터졌다.
나도 덩달아 푸하하 웃었다가 침이 좀 많이 튀었다.
뭐 회사 업무야 빠삭하게 알고 있으니… 마이크 꼬나들고 화이트보드에
개칠해가며 열강을 했다.
말이 좀 빠른 편이라 마치 랩을 하듯이 리듬감을 섞어서…
떠들다보니 더워서 윗도리를 벗었는데… 음… 멜빵에 허리띠까지 차고
온 거를 깜박 잊고 있었다…
하여튼 어찌나 열심히 자세히 설명했는지 질문조차 없더군.
내가 열심히만 하면 늘 이렇게 완벽하지 뭐~
[신입사원 모양의 일기]
1/26 (수) 날씨 관심없음…
아침에 조금 늦게 일어났더니 만원버스를 탔다.
송강호와 박상면과 이범수를 섞어놓은 것처럼 느글느끼한 남자 하나가
자꾸 버스 안에서 몸을 부벼댄다. 재수 똥가리 없는 놈 같으니…
허겁지겁 연수원에서 내렸는데 그 재수없는 인간도 같이 내린다.
팍삭 삭아보이는데 신입사원이었나?
아니었다… 교육장에 앉아서 오늘의 강사를 기다리는데…
그 웃기지도 않은 양복떼기를 입은 재수없는 놈이 연수원 고대리님을 따라
들어오는게 아닌가…
갑자기 회사에 정이 뚝 떨어지더군…
안녕하십니까 기획실 봉달중 대리입니다~
푸하하~ 봉달중~
첨엔 눈치보느라 키득거리기만 했다가 곧 교육장이 웃음의 도가니탕이
되어버렸다.
짜식은 눈치도 없이 따라 웃더군.
윽~ 짜식이 웃으면서 나한테 침을 한사발이나 튀겼다.
늦게 와서 앞자리만 비어있길래 앞에 앉았더니… 이런 시련을…
침에서 썩은 마늘냄새까지 나네?
게다가 강의라고 떠드는데 이건 뭐… 떠듬떠듬… 말은 빠르고… 내용은
핵심도 못잡고 비리비리 거리고…
두세시간 가까이 떠들었는데 진짜 내용 하나도 없다. 저렇게 말하기도
힘들텐데 정말정말 존경스럽다.
가끔 귀에 들어온 단어는 주전자… 주전자… 그런 단어였는데 우리
회사와 주전자가 무슨 상관인지는 아직도 이해를 못하고 있다.
몇 마디 말을 조합해보니 피부장이라는 상관한테 무지하게 피해의식을
느끼고 있드만.
피부장… 봉대리… 무슨 만화에 나오는 조직 같네 꼭…
그래도 다 떠들었다고 질문 있슴까? 라는 말은 하더군.
뭘 들은 게 있어야 질문을 하지.
연수원 성적 좋으면 기획실로 발령내겠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일부러 시험을 망치던가 해야겠다 나원…
이런저런 이유로 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아줌마들 여럿 앉혀놓고 강의 비슷한 걸 해야했었다.
문제는 내가 떠들어야될 내용은 산더미이고
주어진 시간은 한시간 또는 한시간 반.
수차례의 강의(?) 끝에 내린 결론은
“이건 두시간짜리 강의다”
그러나 퇴사하는 그날까지 두시간 강의를 해본 기억은 한손으로 꼽고
가뜩이나 말 빠른데 일부러 터보엔진까지 달아서 다다다 떠들다보니
항상 아줌마들은 무슨 말을 들었는지 가물가물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기 일쑤.
그래도 언젠가 첫사랑이야기 해달라는 아줌마도 있었고
재밌긴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