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적으로 내가 컴퓨터를 배우고 싶게 만든 계기. 아기곰에 가입해있던 동기 최모양이 있는데 이 최모양은 교내에서 알아주는 컴퓨터 실력자였다. 파스칼로 컴퓨터 바이러스를 만드는 수준은 됐다니까. (그땐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전공선택으로 어쩌다 CAD 과목을 듣게 되면서 나는 최모양을 붙잡았다. (숙제해야되니까) 정확히 중간고사를 볼 때까지 나는 CAD에 대해서 개념도 안잡혀있었기 때문에 시험문제를 있는대로 찍고 있었다. 그런데 최모양과 이런 대화를 나눈 것이 아주 결정적이었다.
“CAD로 말이지, 3차원 모형도 만들 수 있냐?” (그 당시 지하철에서 컴퓨터학원 광고를 보면 사람을 3D로 모델링해놓은 그림이 있었다. 나는 그걸 떠올리고 있었다)
“릴리즈 10부터 되거덩”
“그럼 건담두 되냐?”
“건담두 되구 말구.”
그녀의 그 한마디가 내 인생을 바꿔놓고 말았다.
그 당시 대학교 4학년이던 형은 논문 때문에 이런저런 고생을 하고 있었는데, 워드로 쳐서 가져오라는 교수님들 때문에 주말이면 컴퓨터가 있는 친구 집에 가서 작업을 했는데 눈치도 보이고 효율적이지도 않은 눈치였다. 이에 집에서는 거금을 들여서 컴퓨터를 구입하기로 결정했고, 그래도 공대생인 나보고 뭐가 좋은지 알아보라는 특명이 아버지로부터 떨어졌다. 컴퓨터가 생긴다! 그럼 나도 드디어 어렸을 때부터의 환상인, 컴퓨터로 건담을 만들어서 만화영화를 그릴 수 있다! 그때 내 생각은 딱 그거밖에 없었다.
그 후 최모양을 교양시간 전공시간 가리지 않고 줄줄줄 따라다니면서 어떤 컴퓨터를 사면 좋은지 물어봤다. (최모양이 주먹은 쎄지만 성격은 좋았던 거 같다) 386을 사고, CAD를 하려면 코프로세서를 달아야 하며, 디스켓은 5.25인치와 3.5인치를 다 넣을 수 있어야 하고, 모니터는 요즘 칼라가 대세니까 괜히 흑백 사지말고, 램은 4메가 정도 있으면 좋고, 하드는 40메가 이상, 100메가 정도 있으면 좋다고 최모양이 꼼꼼이도 알려줬다. 아버지와 함께 용산으로 달려간 나는 최모양의 주문사항을 줄줄이 읊고 있었고, 나의 타고난 연기력 덕분에 용산 아저씨는 저 놈이 컴맹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Auto-CAD와 3D 스튜디오를 깔아달라고 했지만(최모양이 그거 깔아달라고 하라고 시켰다) 용산 아저씨는 3D 스튜디오에 대해서 난색을 표했고, (최모양이 아마 그건 안깔아줄지도 모른다고 그랬다) 나는 그럼 캐드만 깔아달라고 양보하면서 데스크젯 프린터까지, 약 230만원의 몫돈이 컴퓨터에 쏟아부어졌다.
한참 쓴 거 같은데 인제 컴퓨터 산 거야…? 하여튼 지금은 날짜를 기억할 수 없는 1992년 5월의 어느 날, 우리 집에는 드디어 컴퓨터가 한 대 들어왔다. (아버지가 서비스로 그냥 달라고 떼써서 컴퓨터 책상도 하나 공짜로 얻어왔다) 애플베이직과는 차원이 다른 넘이 내 눈 앞에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공대 PC실의 멍청한 XT 컴퓨터와는 차원이 다른, 386SX의 VGA모니터였던 거시다!!! 램은 4메가, 하드는 120메가, 도스 5.0이 운영체제로 깔려있었고 사운드카드나 모뎀은 없었다. (돈이 모자라기도 했고… 모뎀은 있어봐야 쓸데가 없다는 내 생각도 반영이 되었고, 사운드카드로 뭐 음악이나 듣고 자시고 할 생각도 없었다) 뭐 이것저것 설명해주던 용산아저씨가 가버리고 나서 홀로 컴퓨터와 남겨진 나는 조심스럽게 컴퓨터를 켜고 컴퓨터와 함께 딸려온 “OA를 위한 PC 가이드”라는 조잡한 책을 펼쳐들었다. (이 책, 지금도 집에 있다)
여기서 추억을 되새기는 차원에서, “OA를 위한 PC 가이드” 책의 목차만 대충 훓어보도록 하겠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생소하게 느낄 문구들을 접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제1부 MS-DOS
제2부 GW-BASIC
제3부 dBASE III Plus
제4부 LOTUS 1-2-3
제5부 EDLIN
제6부 PE (Personal Editor)
제7부 NORTON UTILITY
제8부 워드프로세서(아래한글)
지금 내가 봐도 생소한 것도 있다. 하여튼 나는 요놈만 가지고 컴퓨터를 공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