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도에 대학에 입학했다.
말하자면 91학번.
1학년때, 89학번 선배들이 “89학번이니까 매년 8월9일에 모이자”고 정해서 3년째 모이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럼 우리는 91학번이니까 9월1일에 모이자!!라고 나름 결의를 해서
그해 9월1일, 개강파티를 겸한 첫 “9.1절”행사를 가졌더랬다.
앞으로 해마다, 9월1일이면 모이자는 단호한 결의도 함께.
날짜가 워낙 그렇다보니
대학 다닐 동안에는 개강파티 겸해서 꼬박꼬박 9월1일에 모였던 것 같다.
1998년 이후, 대부분의 동기들이 졸업을 하고, 그러면서 IMF 한파에 맞서싸우느라 바쁘게들 보내면서도
9월1일에 딱 맞추지는 못해도 비슷하게 그 주 토요일, 금요일 이렇게는 약속을 잡아서 모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하나둘 결혼하고, 아이도 생기고, 사회생활도 여전히 퍽퍽하고, 그렇게 되면서,
최근 한 몇년간에는 서로 “올해 9월1일에는 모여야지”라고 말은 하면서도
겨우 연락되는 대여섯 정도만 모이는 정도로 모임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더랬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올해는 2010년.
올해 9.1절이 20번째더라. (1991년이 첫번째니까)
재작년에 내가 동기회장을 맡았다가 결혼 등을 핑계로 전체 연락 한번 없이 말아먹은-_- 후
동기회장을 떠맡은 윤 모군이 이번에야말로 잔뜩 모아보자며 동기 전체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나보다.
오랜만에 도착한 “9.1절” 모임 공지.
어느새 우리 동기들 아지트처럼 되어버린 강남역 근처의 모 고깃집에 가보니
내가 두번째-_- 도착.
그래도 바로 이어서 하나둘 나타나는데
늘상 보던 놈들도 있고
오랜만에 보는 놈들도 있고.
얼추 모였으니 먹어보자고 고기 시키는데
미국산 소갈비살이 돼지삼겹살보다 싸더만.
(돼지삼겹살이 600g에 3만원, 미국산 소갈비살이 600g에 29,000원-_-)
그래서 돼지고기 안시키고 (중간에 갈매기살을 한번 시켜봤는데 맛이 별로-_-) 소갈비살만 엄청 먹었음.
20년 뒤엔 광우병 약 나오겠지 뭐.
고기 굽다보니 뒤늦게 도착하는 넘들도 있고
최종적으로 모인 인원이 18명.
동기가 전부 70명인데 25% 정도 모인 셈.
그나마도 다른 학교로 옮겨가버린 넘, 뭐하는지 아예 연락도 안되는 넘, 지방으로 내려가 올 수 없는 넘, 외국에 있는 넘, 먼저 세상을 뜬 넘… 뭐 이런 식으로 빼보다보면
그래도 3~40% 가량 모인 거니 많이 모였다고 볼 수도.
간만에 잔뜩 모여서 왁자지껄 떠들어대는데
전공이 같다보니 하는 일들도 크게 다르지 않아
서로서로 하는 일은 잘되는지 묻고, 어느 선배 어느 후배가 어디에 있고 어디서 뭐하고 그런 정보 교환하다가
결론은 “부동산이 침체라 걱정”.
별로 살아날 것 같지도 않다는 진단도 함께.
뭐 그런 건 다 떠나서
스무살 때 처음 만나서 20년을 흘려보내다보니
어느새 다들 마흔줄이 되어있더라는 거.
19년전 9.1절에는 어떤 대화들을 나눴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개강기념 M.T얘기 같은 거나 하지 않았겠나?)
이제는 먹고 사는 거 걱정, 자식 걱정, 내 몸 걱정, 걱정거리들로만 대화가 이뤄지는 중년이 되어있더라는 거.
회사 다니는 놈들은 이제 떨려나갈 때가 머지 않았다는 걱정,
나름 자기 사업 하는 놈들은 경기침체로 일이 잘 풀리지 않아 걱정,
늦게 결혼해서 늦게 아이 낳은 놈들은(본인 포함) 언제 아이 키워서 자립시키느냐고 걱정,
일찍 결혼해서 아이 좀 큰 놈들은 마누라가 자꾸 괴롭힌다고 걱정,
아직 결혼도 못한 놈이 머리까지 홀랑 빠진 한놈은 이래저래 걱정.
대한민국 중년의 고민이 무엇인지 종합세트로 체험하다가
아직 태풍의 기세가 거세지기 전에 버스 타고 집으로 돌아왔음.
(술먹고 쫙 뻗어서 자느라고 전혀 몰랐는데 밤새 나라가 난리가 났더만-_-)
그래도 좋았던 게
누구한테 잘보여야되고, 눈치봐야되고, 억지로 앉아있어야되고,
직장생활 하면서 그런 류의 술자리가 대부분인데
그런 거랑 전혀 상관없이 신나게 웃고 떠들어도 되는 자리였다는 거.
내 주머니에서 돈 나가서 술 먹는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지만.
(1차에서 회비를 과하게 걷었더니 전원 2차까지 참석했다는-_-)
내년에는 명색이 20주년인데 거하게 행사라도 하자는 얘기가 나왔는데
뷔페라도 빌려서 가족들까지 전부 모여서 식사나 하자.. 뭐 이런 류의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더니
“가족들 버리고 우리끼리 1박2일 엠티나 가자”
…알고보면 이 모임도 하나의 도피처인 모양.
한때 동기사랑 나라사랑을 구호처럼 외치고 다녔던 시대가
20회 9.1절을 맞아 썼습니다.
말아먹은 동기회장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