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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어렵게 태어나서 어렵게 살던 시절

1997년 12월 20일

나는 태어나는 것부터 순탄하지가 않았다… 워낙 씩씩한 형을 둔 나는 부모님께서 셋방살이를 할 때 애기가 왜 이렇게 시끄럽냐고 눈치를 주는 주인집 때문에 지금 애를 낳지 말고 집을 장만한 다음 애를 낳자는 합의하에 뱃 속에서 애떨어지는 약을 먹어야 했다. 다행히 약발이 약했는지 나는 태어났다. 약에 대한 후유증은 현재 조금(특히 머리쪽) 남아있는 거 같지만…

부모님이 겨우 집을 산 뒤 남은 돈이 없어서-_- 힘들게 지내던 시절, 세 살도 채 못된 나는 군것질은 하고 싶은데 집에 돈이 없는 관계로 골목길에서 손가락이나 빨고 있어야 했다. 배가 고팠다기보단 호기심도 나고 심심했던 탓에, 나는 길바닥에 누가 빨아먹다 내버린 쭈쭈바 껍질을 주워서 쭉쭉 빨아먹고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한테 들켜서 죽도록 얻어터졌다. 그 후 어머니는 나를 시장에 데려가기만 하면 아무 군것질거리라도 사주고 싶으셔서 안달이셨지만, 나는 지금껏 군것질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역시 어린이는 어렸을 때 패야 제대로 교육이 된다.

어렸을 적, 토마토를 되게 좋아했었다. 하루는 어머니가 토마토 두개를 나에게 주며 “하나는 안방에 할머니 드리고, 너도 하나 먹어라”라고 말씀하셨단다. (나는 기억안난다. 어머니 증언에 따라 기록중) 그런데 내가 도로 부엌으로 와서 “엄마 할머니 안드신대” “그래? 그럼 네가 다 먹어라” 잠시후 할머니가 부엌으로 오셔서 “아까 아가 뭐라가냐?” (전라도 사투리. 애기가 뭐라고 하더냐? 의 뜻임) “어머니 토마토 드리랬더니 안드신다길래 종민이 먹으라고 했지요.” “요놈시키 할머니한테 가져와보지도 않구서!!”

어려운 집안 여건상 유치원을 다니지 않았던 나는,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수많은 아이들이 바글거리는 학교의 분위기에 완전히 주눅이 들어버렸다. 선생님이 율동을 가르켜줘도 따라하지도 않았고, 말도 하지 않고 구석에 앉아서 입술만 삐죽거리고 있었다. 당시 나의 담임선생님은 내가 저능아가 아닌가하고 심각하게 의심하셨다고 한다. 선생님의 의심은 내가 첫 월말고사에서 백점을 맞으면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