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후
무위 고장 사람으로 자는 문화(文和). 처음 동탁의 막하에 있다가 동탁이 패하고 잔당이 지리멸렬할 때 이들을 이끌어 도성을 회복하고 이각, 곽사 등에게 실권을 쥐어주었다. 이각과 곽사가 서로 다투면서 자신의 말을 듣지 않자 몸을 피해 또다른 동탁의 잔당인 장제의 조카 장수를 도왔다. 조조를 완성과 양성에서 두 번 무찔렀으나 힘의 부족을 실감하고 장수와 함께 조조에게 귀순했으며 그후 마초가 조조를 공격해 궁지에 몰렸을 때 한수와의 반간계를 써서 승리를 이끌었다. 조비가 황제로 즉위한 얼마 후 병을 죽었다.
곽가
영주 영음 사람으로 자는 봉효(奉孝). 조조의 모사인 순욱과 동향. 모사 정욱의 천거로 조조의 막하에 들었다. 여포와 조조가 복양에서 싸울 때 조조의 거짓죽음을 소문내 여포를 크게 무찔렀고, 그밖의 크고 작은 계책을 내 조조군의 승리를 도왔다. 원소 세력을 멸망시킨 뒤 잔당을 소탕하기 위해 사막까지 종군했다가 풍토병이 들어 역주에서 요양하다가 죽으니 38세의 아까운 나이였다.
삼국지에는 휘황찬란한 창검을 휘두르며 적진을 휩쓸어버리는 무장만이 인기있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삼국지에서 가장 유명하다면 유명한 인물인 제갈공명도 무장이 아니고, 그 외에도 무장들만큼이나 많은 모사(문신)들이 숱한 전쟁에서 계책을 내고 장수들을 지휘하는 모습으로 삼국지에 등장하고 있다. 소설의 중반 이후 제갈공명이 등장하면서 머리 좀 쓴다 하는 모사들이 죄다 도토리 키재기 수준으로 취급받기는 하지만, 제갈공명 앞세대에도 나름 천재적인 지략가들의 불꽃튀는 머리싸움이 충분히 있어왔다. 그중 대중들에게는 비교적 덜 알려졌으면서, 삼국지 매니아들에게는 최고의 두뇌로 꼽히는 두 사람이 바로 가후와 곽가가 아닐까.
“변신의 명수”, 가후
출처가 기억나지 않는 오래된 글이지만 가후를 일컬어 <변신의 명수>라고 쓴 글을 읽은 기억이 있다. (다시 찾아보니, 이문열의 평역삼국지에서 진등의 이야기를 하다가 “가후보다 더한 변신의 명수” 운운한 대목이 있다) 동탁에서 이각/곽사, 이각/곽사에서 단외, 단외에서 장수, 장수에서 다시 조조로 옮겨간 이력만 보면 확실히 변신의 명수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우리가 보통 누군가를 <변신의 명수>라는 식으로 깎아 호칭할 때는 그 사람이 뭔가 이익을 좇아 자신의 주인을 쉽게 버린다는 의미일 때가 많다. 과연 가후가 그랬었나?
처음 동탁의 밑에 있었던 것부터가 가후의 험난한 인생 시작이었다. 자기가 직접 나쁜 짓을 했건 안했건, 동탁이라는 희대의 망나니를 주인으로 모신 덕분에 동탁이 죽고 나자 누군가가 자기를 거두어줄 기대보다 목이 달아나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 더 우선이 될 수밖에 없었던 거다. 오로지 자신을 거두어줄 수 있는 사람들이라곤 동탁의 수하장수였던 이각 곽사 장제 번조 무리뿐이었고, 가후는 순전히 제 살 길을 찾기 위해 이 형편없는 무사들을 이끌어 도성을 탈환해야했다. 이각과 곽사가 자중지란으로 무너지기 시작하고 조조가 그들을 공격했을 때도 그가 살아서 도망갈 수 있었던 곳은 이각 곽사와 같은 무리였던 장제와 그의 조카 장수의 밑이었다. 마지막에 가서야 조조에 항복하기는 하지만 자기 혼자 살겠다고 한 항복이 아니라 주인인 장수와 수하들을 모두 살리는 선택이었다.
뭔가, 변신의 명수라는 칭호가 붙는다면 지금 우리와 창칼을 맞대고 있는 적군에 투항하면서 아군에 불리한 계략을 내놓는다는 식의, 알고보니 이중간첩, 뭐 이런 이미지인데, 가후의 경우는 단 한번도 적군에게 내 한 몸 살아보자고 넘어간 적이 없다. 오히려 변변찮은 주인들을 만나 자신을 철썩같이 믿게한 후 자신의 능력만으로 기어코 살아남아버리는, 그런 능력을 가진 모사였을 뿐이다.
“봉효만 살았더라면”, 곽가
유비는 착한 놈, 조조는 나쁜 놈, 손권은 누구여? 수준의 삼국지 지식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제갈공명이 삼국지 최고의 천재겠지만, 나름 삼국지 매니아라고 자처하는 사람들(특히나 객관적으로 삼국지를 본다는 명목하에 조조를 편애하는 사람들)에게 삼국지 최고의 천재는 곽가이다. 어설픈 삼국지 독자들은 이름조차 생소한 곽가가 제갈공명보다 높게 평가받는다면 어머 놀래라 하실 분들 많겠지만, 왠만큼 삼국지를 좋아한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중에 곽가를 인정하는 사람은 상당히 많다. 특히나 요절한 천재, 뭔가 제멋대로인 성격에 괴팍한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사람으로 말이다.
무엇이 곽가(의 이미지)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많이들 인정하지만, 곽가를 “요절한 천재” 이미지로 만든 가장 결정적인 대목은 적벽대전 이후 조조의 통곡장면이다. 화용도에서 관우에게 죽을 뻔했다가 겨우 목숨만 부지한 조조가 남군으로 들어가 통곡하면서 “곽봉효만 살아있었더라면 이런 실패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건데, 일부 곱지 않은 시선으로는 조조가 대참패의 책임을 은근슬쩍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술책이었다고도 말해지기는 한다. 그 외에도 사실상 중원의 패자를 결정짓는 원소와의 싸움에서 곽가의 머리가 큰 역할을 했었고, 이문열 평역삼국지에서는 순욱 순유 등은 (후일 조조가 위공/위왕이 될 때 반대하다가 죽었다는 지극히 결과론적 해석이긴 하지만) 한나라 황실에 대한 충성심이 남아있었지만 곽가는 온전히 조조의 사람이었다고 해석하기도 했다. 분명한 것은 조조가 곽가를 상당히 아꼈고, 직접 말했듯 (유비가 공명에게 아두를 부탁하듯) 자신의 후대를 맡길만한 사람으로 믿었다는 사실일 게다.
여기서 살짝 삐딱선을 타보면, 삼국지를 촘촘히 읽지 않은 탓인가 몰라도 곽가의 활약이 다른 조조의 모사들에 비해 유난히 탁월하다는 느낌을 받은 기억은 없다. 오히려 곽가에 대한 조조의 무한신뢰가 곽가라는 인물을 포장하고 있을 뿐. 원소와의 관도대전에서 곽가의 지략이 빛을 발했다고는 하나 (특히나 죽으면서 남겨놓은 편지는 대박) 다른 조조의 모사들이 입닫고 열중쉬엇하고 있었던 것도 또 아니다. 의외로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전장에서 병력을 운용하고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곽가가 천재적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진정 곽가가 빛을 발하는 대목은 조조의 큰 행동을 결정짓는 부분이었다. 하비성의 여포와 장기대치에 지친 조조가 퇴각을 하려할 때 말린 것도 곽가였고,(사람들은 이때 수공을 건의한 전술적 측면을 더 높게 치지만, 내가 보기엔 말린 것 자체가 대단한 거다) 원소와 대치하고 있는데 손책이 뒤를 공격해온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도 퇴각을 말린 것이 곽가였다. 유명한 10승10패의 이유로 원소와의 싸움을 독려한 것도 곽가였고, 원소일가가 망한 뒤 오환정벌을 주장한 것도, 도망친 원담과 원희를 쫓아 요동태수를 공격하려 할 때 말린 것도 모두 곽가였다. (이렇게 화려한 상황판단력에 반했는지, 이문열 평역삼국지에서는 조조가 낙양으로 들어온 것도 곽가의 조언에 의한 것처럼 쓰고 있다. 내가 알기론 정사 등에 없는 이야기다)
삼국지 매니아들의 곽가에 대한 현재 이미지를 조금 과장해서 “광끼어린 천재”쯤으로 본다면, 내가 보는 곽가의 이미지는 오히려 “냉철하고 이성적인 상황판단의 달인”이다. 조조가 적벽에서 패한 후 통곡하는 대목도, “곽가가 있었다면 적벽에서 유비와 손권을 무찔렀을텐데”라기보다는 “곽가가 있었다면 싸움을 말렸을텐데”로 읽힌다는 말이다. 만약 정말 곽가가 살아있었다면 적벽대전이 벌어지지 않았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가후와 곽가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가, 요즘 네이버에서 연재 중인 만화가 최훈의 <삼국전투기>에서 양성전투 대목을 읽고나서다. 실제로 참전했을지가 의문스러운 곽가를 조조의 진영에 끌어넣어 삼국지 전반부에서 쌍벽을 이루던 가후와 곽가, 두 명의 천재를 기어이 싸움붙여놨는데, 댓글로 가후가 더 낫네 곽가가 더 낫네 싸우는 사람들이 있더라. 다른 글에서도 썼지만, 코에이의 삼국지 게임이 여러 사람 망쳐놓는 바람에 삼국지에 나오면 무장이던 모사던 지력 무력 비교해서 줄세우고 싶은 사람이 왜이렇게 많은 건지. (참고로 내 기억에 삼국지 게임에서 가후가 곽가보다 지력이 앞섰던 적은 없었던 걸로 알고 있다. 가후가 93~95 정도였다면 곽가는 96~99 수준)
내가 보기에 가후는 자신의 처지와 상대방의 처지를 살펴 각각의 강점과 약점을 양방극대화시켜 승리를 따내는데 천재적이고, 곽가는 자신의 처지와 상대방의 처지를 살핀 뒤 현재 자신들이 행동해야할 가장 최선의 답을 내놓는데 있어서 천재적인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지금 싸워야 되나 말아야 되나가 고민된다면 곽가에게 묻고, 어찌됐건 싸워야되고 반드시 이겨야한다면 가후에게 물어야한다는 거다. 이런 두 사람을 어떻게 줄세워서 비교할 수 있겠나.
아쉽게도 삼국지 3에서 가후의 지력이 곽가의 지력을 앞섭니다.
곽가는 80!! 충격적인 수치지요. 뭐 게임이니까요. 게임상 병법서를 줘서 간신히 90에 턱걸이 합니다. 가후는 이미 90대이기때문에 무리없이 100넘기죠.
그렇군요. 3편에서는 지력이 80이네요. 대신 정치력이라는 항목이 새로 생겼는데 무려 97-_-을 줬네요. 비슷한 예로 오나라의 장소가 있는데, 2편에서는 지력이 95였으나 3편에서는 지력 86, 정치 94네요. 모사로서의 재능과 행정가로서의 재능을 구분하려는 시도인 것 같은데, 왜 곽가를 행정가로 본 건지는 잘 모르겠군요.
4편에서는 다시 지력이 올라가서 99, 정치는 92가 됐네요.
시대가 썼습니다.
곽가의 정치가 높은 이유는 곽가가 원소의 남은 세력을 소탕하려 북으로 이동했다는 부분에서,
곽가는 문화가 전혀 다른 이민족을 정벌하면서 북방의 기마족을 조조군에 합류시켰고,
위국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게 한 정치적인 활약이 크게 남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곽가, 가후에 관한 비교가 정말 명쾌하면서도 확실하네요..
좋은 글 정말 잘 읽고 갑니다.
삼국지 3에서는 사실 정치력이 더 중요한 게임이죠. 지력이야 90 턱걸이 하는 군사(가령 원소측 전풍) 한명에 손자병법서 안겨주면 100이 되면서 조언이 100% (일부 버전에서는 버그때문에 외교 조언은 거꾸로 해석해야 했지만) 맞아 떨어지게 되는데 실제로 여러 평시 계략(위서의심등등)을 사용하는데 지력보다 정치력을 요구하는 분야가 더 많았거든요.
재미있어서 읽어도 자꾸 읽게 되내요 ^^
다만 07년이후로는 안적으셨내요 ㅠ_
다른 장수들도 정리 해주셨으면 하는대 ㅠ_ 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