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대리의 일기]
1/18 (화) 날씨 조오코…
아침에 넥타이를 매면서,
거울 속의 내 얼굴을 (솔직히 오래 쳐다보기 괴로운 그 얼굴) 바라보며
한마디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오늘은 전쟁이다.
오늘 아침 피부장 출근할 때까지 책상에 갖다놔야할 보고서는 어제
피부장의 현란한 손기술에 의한 빨간펜자국이 선명한 상태 그대로
내 책상에 잠들어있다.
피부장은 가끔 자기가 빨간펜 선생님인 줄 착각하던데…
어디 내 얼굴에 빨간펜질을 함 해보라 이거야…
아니나다를까, 피부장이 아침부터 콜을 했다.
아무 말없이 내미는 손바닥.
손바닥을 내리쳐 짝! 소리를 내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았다.
오늘 오전 중으로 드리겠습니다.
내가 아침까지 달라고 하지 않았나?
몇시간 늦는 건데요 뭘.
얍!! 잽싼 동작으로 날라든 서류뭉치를 피했다.
뭐 새꺄? 너 전쟁터에서 몇시간이면 몇사람 죽어나가는지 알아?
그렇게 시급한 보고서가 아니잖습니까.
뭐이 새꺄? 위에서 달라는 보고서 이상으로 급한 보고서가 어딨어?
업무상 급하지 않은데요 뭘.
웃기고 자빠졌네. 니가 부사장한테 그렇게 씨부려봐라.
그건 못하지. 나도 사리분별은 있거덩.
짤리는게 무서워서가 아니라 부사장은 진짜 패거덩…
어차피 부사장님 지금쯤 이 보고서 기억도 못하실 검다.
갑자기 할 말을 잃은 피부장. 흐흐흐 정곡을 찔렀다.
위에서 재촉 안한다고 일을 안해? 그게 아랫사람의 올바른 태도야?
찾기 전에는 분명 갖다드릴 겁니다.
좋아. 두고보자.
1라운드 승리~
뭐 어차피 보고서에서 큰 틀이 바뀌는 건 없다. 조사 조금 고치고…
표 빼고… 표 넣고… 내용은 그대로인데 뭘… 계산기 다시 두드려서
숫자 조금 깎아보고.
점심시간 직전 새로운 보고서를 내밀며 피부장에게 물었다.
이뿌죠?
울 회사 보고서는 내용보다 윗사람 보기에 이뻐야된다.
디자인 스쿨도 아닌데 별…
아냐. 요즘 사장 눈이 침침해지고 있기 때문에 이거 폰트가 너무
작은 거 같고…
오전까지 곧 죽어도 끝내야될 거 같더니 피부장의 빨간펜이 다시
요동을 친다.
점심먹고 2라운드.
오후 3시경에 3라운드.
5시에 4라운드를 마쳤다.
음… 오늘도 어제 깨진 첫번째 보고서와 이틀에 걸쳐 수정한 보고서를
찬찬히 비교해봤다.
별 다를 거 없구먼.
힘든 전쟁을 마쳤으니 술이나 한잔 하고 들어가야지~
[피부장의 일기]
1/18 (화) 날씨가 날랑 뭔 상관이더냐…
마누라가 주는 넥타이를 목에 잡아매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오늘은 봉대리 잡는 날.
옛날에 동사무소에서 “쥐잡는 날”이라며 쥐약 나눠주던 게 생각난다.
봉대리 잡는 약은 봉약?
출근해보니, 뭐 예상은 했지만 아침에 봉대리가 내밀어야할 보고서는
자취가 없다.
봉대리~
손가락을 세워서 까딱까딱 부르니 쪼르르 달려온다.
내놔.
안했는데요. 오전 중에 드리겠습니다.
아침까지 달라고 했을텐데?
몇시간 늦는 건데요 뭘.
오케바리 그 말을 기다렸다!! 미리 서류뭉치처럼 쌓아놓은 이면지더미를
확 잡아뿌려버렸다. 기선 제압!!! 성공!!!
너 새꺄! 전쟁터에서 몇시간 늦으면 몇사람이 죽어나가는지 알아?
그렇게 시급한 보고서가 아닌데요.
어떻게 알았지?
저놈이 일 안하는 듯 하면서도 맥은 잘 파악하고 있다니까.
하긴 그러니까 요령껏 놀면서도 여태 회사에 붙어있지… 존경마려운
놈…
마, 위에서 급하다는 보고서가 젤루 급한 거 몰라?
업무상 급하지가 않은데요.
웃기고 자빠졌네. 니가 부사장한테 그렇게 씨부려봐라.
그건 못하겠지? 부사장은 열받으면 진짜 패거덩.
작년에 영업1팀 김과장이 부사장한테 맞아서 왼쪽눈에 시퍼렇게 멍들어
다니던 걸 봉대리라고 잊었을라고?
(야, 접대할 손님하고 고급룸싸롱 갔는데 자기 안불러줬다고 패는
부사장이 어딨냐고.)
어차피 부사장님은 이거 기억도 못하실 검다.
윽! 정곡을 찔렸다.
부사장 기억력이 형편없다는 사실을 저녀석이 이 시점에서 끄집어
내다니.
1라운드 패배.
두고보자. 어디 그렇게 쉽게 넘어가지나.
점심먹기 전에 봉대리가 2차 수정 보고서를 들고 왔다.
얍! 공포의 빨간펜!
표 빼! 표 넣어! 글자 크기 키워! 줄간격 늘려!
내용은 솔직히 관심도 없고 이뿌게 만드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3차 보고서도 툇자!
4차 보고서도 툇자!
5시에 가져온 보고서를 (오늘을 넘겼다가 만에 하나 부사장이 기억을
하게 되면… 끔찍해진다) 겨우 통과시켰다.
음… 마구 고치다보니 돌고 돌다가 처음 꺼랑 많이 비슷해졌네.
빨간펜질을 너무 했더니 어깨가 아프다.
집에 가면 딸내미 시켜서 어깨나 주무르라고 그래야지.
네년 벌어멕일라고 아빠가 이렇게 어깨가 아프잖아…
한마디 하는 것도 빼먹지 말고.
이건 직장을 다니며 겪은 에피소드라기 보단 군대에서 자주 겪었던 에피소드.
(행정병으로 근무하다보니 직장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맨날 고치고 고치고 고치고… 고치다보면 원상복귀되고.
참 지긋지긋했던 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