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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담 속의 여성들

1998년 8월 8일

건담 시리즈에서는 여성 파일럿들의 등장이 무척 많다. 머릿수만 세보면 남자가 더 많겠지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만 놓고 보면 여자의 비율이 조금 더 높을 것이다. 특히 <Z건담>에서는 카미유의 적으로 등장하는 캐릭터 중에 남자는 제리드 메사, 야장 게블, 펩티머스 시로코 정도이고 나머지는 전부 여자다.

하지만 등장하는 인물들에 비해 건담 시리즈의 여성들은 크게 세가지 뻔한 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것도 내가 보기에는 전부 그다지 바람직하지 못한 모습이다. 건담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을 패턴별로 구분해보자.

하나, 하나밖에 모르는 개념없는 여성

건담 시리즈를 통해서 가장 많이 널려있는 모습이다. 이성적인 사고나 논리적인 판단이 메말라버린 여자들로, 대개 이 여자들의 주제는 ‘사랑’이다. 아무로 레이의 최고 적이었던 라라아는 왜 지온을 위해 싸우는지, 왜 아무로와 교감을 느끼면서도 샤아를 위해 목숨을 버려야 했는지 아무런 논리적 이성적 이유를 달지 않는다. 그저 고아로 커왔던 그녀를 돌봐준 샤아에 대한 사랑? 의리? 그것뿐이었다. 지온의 에이스 파일럿이었지만, 그녀가 에레즘이니 뉴타입이니 하는 것에 관심이나 있었을까? 강화인간이라는 단서가 달리긴 하지만, 포우는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기 위해 무작정 싸우고 있을 뿐이고 로자미아는 말그대로 그냥 싸운다.

더욱 한심한 존재들은 <Z건담>에 등장하는 시로코 추종자들이다. 시로코라는 한 인간의 매력에 이끌린 사라와 레코아(이 여자는 아예 에우고에서 연방군으로 넘어갔다)는 시로코의 마음에 들기 위해 경쟁까지 벌이고, 사라는 카츠로부터, 레고아는 카미유로부터 여러 차례 진심을 접하지만 모두 거부하고 전사한다. 쟈브로 기지에서 제리드를 구한 마우아는 시로코가 능력을 높게 평가했지만 평생 제리드의 보좌역에 그쳤고 결국 제리드를 대신해서 전사했다.

<ZZ>에 등장하는 푸루나 푸루 투도 마찬가지 경우다. <샤아의 역습>에 등장하는 쿠에스도 마찬가지다. 샤아나 아무로, 카미유, 애너벨 가토 등 남자 파일럿들은 뭔가 이념도 있고 싸우는 명분도 있어보이지만 이 여자들은 자신이 왜 싸우는지, 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지에도 관심이 없어보인다. 이 여자들의 최고 관심사는 사랑이고(포우는 기억에 대한 향수, 로자미아는 오빠에 대한 그리움? 정도로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모두 사랑을 위해 과감하게 목숨을 던졌다.

조금 다른 경우는 화이트 베이스의 승무원인 밀라이와 세일러가 있다. 세일러는 오빠인 샤아와 자주 부딪히지만 그녀가 끝까지 연방군에 남아있는 이유도, 지온을 떠난 이유도 어느 것도 불투명하다. 샤아처럼 어떤 목적의식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도 아니고, 아버지의 유지를 오해하고 있다며 오빠를 비난하지만 역시 오빠에게 끝없는 애정을 보인다. 또한 전반부에서 씩씩한 모습을 보여주던 밀라이는 중립 코로나인 싸이드 6에서 약혼자 캄란을 만난 이후 묘한 모습을 자주 보인다. 브라이트, 캄란, 스렛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지만 그녀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0083>에 등장하는 니나는 이 경우와 다음에 소개할 경우에 모두 포함되는데, 마지막 싸움에서 코우와 애너벨이 대치했을 때 그녀는 아무런 명분도 없이 그저 사랑 사이에서 고민할 따름이었다.

둘, 남자와 별 구분이 안가는 여성

첫번째 타입과 대비되는 타입으로, 일단 군복을 입은 여성은 첫번째 아니면 이 두번째 타입이다. 왜 남자와 별 구분이 안가는가 하면, 싸움을 남자 못지않게 해낸다는 의미 외에 일단 얼굴부터 화장기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화이트 베이스의 세일러나 밀라이도 화장기가 별로 없었지만, <Z건담>에서 등장하는 여성들은 특히 이 특징이 두드러진다. 에마 신은 전쟁터에서 냉철하기는 왠만한 남자 못지않으며(레고아 때문에 흔들리는 카미유를 다그칠 정도였으니까) 헨켄의 은근한 구애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양념처럼 곁들여진 장면은 빼도록 하자) 첫번째 타입인 레고아와 싸우다가 전사했다. <0080>의 크리스도 사랑에 모든 걸 바치는 타입은 아니었고 역시 화장기가 없다. <건담ZZ>에서 루 루카도 화장기가 없다.(심지어 쥬드보다 키도 크다)

조금 다른 경우가 연방군의 라이라 미라 라이라 정도… 강한 여성으로서 파워가 돋보이기는 <Z건담>을 통틀어 가장 앞서가지만 약간의 화장을 한다. 그러나 그 점만 빼면 제리드의 은근한 구애에 시큰둥하고 오히려 힘에서 제리드를 압도하는 모습이라거나, 남자처럼 보디빌딩을 하는 모습을 삽입시킨 점이라거나 첫번째 타입으로는 보기 힘들다.

카미유의 어머니는 어떤가? 물론 화장기도 없고 연방군에서 일하고 있다. 워낙 짧게 등장하니까 성격까지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카미유의 아버지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로 그녀가 스토리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쉽게 알 수 있다.

나는 첫번째 타입보다는 이 타입에 대해서 별로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사랑에 몸바친 여자들은 전쟁터에서도 죽어라고 립스틱을 바르고 다니는데, 사랑 따위에 신경쓰지 않는 여자들은 화장기 없는 맨얼굴로 다닌다는 사실이 지나친 이분법적 사고 같아서 신경질이 날 따름이다.

셋, 꽃 역할 외에는 뭘 하는지 모르는 여성

말하자면 극에 포함된 양념이라고 할까, 전쟁터에 존재하고 있지만 군인은 아니다. 주 역할은 주인공 또는 그에 준하는 캐릭터를 좋아하는 역할이고, 저쪽이 나를 좋아하거나 말거나 큰 상관이 없다.(이 점이 첫번째 타입과 다른 점이다) 건담에서 후라우는 캐릭터 중에서 유일하게 미니스커트에 맨다리가 제복인 여성으로, 아무로를 좋아하는 역할이고 적당한 눈요깃감이라는 것 말고는 극에서 빠져도 아무 상관이 없다. 마찬가지로 <Z건담>에서 화도 유일하게 미니스커트에 맨다리를 하고 있으며, 메터스라는 모빌슈트를 몰기는 하지만 역시 큰 역할이 없다. 아이들이 걱정되서 전선에서 이탈하는 과감함(?)을 보이기까지 했으니까. (그래도 후라우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샤아의 역습>의 첸도 아무로를 좋아하는 역할로 역시 미니스커트(플레어스커트라고 해야하나?)에 맨다리이다. 다카르에서 용감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벨토치카 역시 아무로를 도와서 그의 능력을 각성시키는 임무가 더 중요하고 뉴홍콩에서 옆이 쭉 찢어진 중국 드레스를 입고 나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어떻게 보면 첫번째 타입에 가까운 이들을 굳이 다른 타입으로 묶은 이유는, 시청자들에게 눈요깃감을 제공하는 캐릭터로 기획단계에서 설정된 것이 틀림없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시청률을 위해 태어난 여성들. 그것도 주인공을 향한 일편단심이 돋보이는 여성들. 기가 막힌 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