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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림문고

2008년 1월 29일

요즘의 나를 보면 그다지 “책을 많이 읽는다”라고 할 수 없는 처지이지만
어렸을 때는 용돈(또는 세뱃돈) 받으면 무조건 책을 살 정도로
책을 많이 읽는 편,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어렸을 때는 대충 중학교 정도까지가 되겠다)

아마 중학교 이후로는 건담과 추리소설에 빠져서 제대로 된(?) 책을 사본 기억이 없다 싶지만,
국민학교 다니던 시절만 해도 내가(아울러 형이) 주로 사보는 책은
<계림문고>라 불리우던 노란 표지의 책들이었는데
‘소년소녀세계명작문고’가 아마 정식이름이었을 거다.
1권은 확실히 기억하는데 <집없는 소년>(집없는 천사…라는 제목이었던 것 같지만)이었고…

전부 200권이 넘는 시리즈였는데 집에 150권 정도는 있었지 싶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 권당 100원인가 싸게 팔았던 적도 있고 해서 무진장 사서 모았던 기억이.
세뱃돈 받을 때면 한꺼번에 열 권 가까이 살 수 있었으므로
(형제가 받은 돈을 다 합쳐서 사니까)
설날이 다가올 때면 이번엔 뭘 사나… 책 뒤편에 있는 시리즈목록을 보며 한참을 형제가 머리 맞대고 골랐던 기억도 있고.

아무튼, 우리가 지금 보통 생각하는 고전명작들은 어지간하면 계림문고를 통해 다 읽어본 거 같다.

나중에 머리 좀 굵어지고 나서
아무래도 계림문고판은 ‘소년소녀…’들을 위해 조금 각색 내지는 축약된 것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어른 되면 그 책들 다시 완역본으로 사서 모으리라…라는 쓸데없는 다짐을 한 적도 있는데
실제로 몇몇 책은 다시 완역본을 사서 모은 것도 있다.

그 중엔 <삼총사>처럼 상당히 많은 내용이 바뀌어버린 것도 있었지만
(밀라디와 아토스가 부부였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 못했다. 기타 수많은 불륜 이야기들은 대충 짐작했었지만)
최근에 무려 10권짜리 완역본을 사들인 <서유기> 같은 경우는
세부적인 내용이야 군데군데 빠졌을지 몰라도
구체적인 에피소드는 계림문고판에서도 거의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오히려 깨닫게해주기도 했다.
완역본이 제법 두꺼운 편인 <해저2만리>도 계림문고판이 상당히 성실하게 번역되어있더만.

그럼 그 무려 150권에 달하던 책들이 지금은 어디에 있느냐.
아마 신림동에서 양재동으로 이사갈 때 다 버려버린 것 같은데
요즘 헌책방 돌아다니며 계림문고나 클로버문고(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클로버문고가 훨씬 고가에 거래된다고 한다… 아마 많이 나오지 않은 탓이겠지) 사모으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니
그냥 갖고 있었다면 꽤 짭짤했을텐데… 라는 생각도 좀 든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그 책들을 다시 사모으기도 뭣하고.
(헌책방에 있으면 2000~3000원 정도에 파는 모양인데 100권을 사려면 30만원 아닌가)

갑자기 계림문고가 생각난 이유는
며칠전 어머니한테 끌려나가서 백화점에 들렀다가
(백화점 지하식당에서 왠 뚜쟁이 아줌마한테 헌팅당했는데 아직 연락은 없다)
어머니가 옛날에 보던 책 사신다고 교보문고까지 가봤는데
계림문고처럼 소년소녀세계명작들을 주루루 엮어놓은 시리즈는 없고
그나마 이름 좀 있는 몇몇 유명한 작품들만 겨우 완역본이 나와있는 상태더라는 거다.
그나마 아동소설에 가깝게 취급받는 <집없는 소년> 같은 작품들은 아예 어린이용(글자 크게 삽화 많게)으로 나오는게 대세일 정도.
(좀더 열받는 거 그런 책에 하나같이 “초등논술용” “논리논술대비” 뭐 이런 문구가 붙어있더라는 거)

내가 뭐 어렸을 때 책 많이 봐서 이렇게 훌륭하게 자랐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닌 건 확실하지만
나중에 내가 아이를 낳아서 키울 때 뭔 책을 사다 읽히냐… 라는 쓸데없는 고민이 하나 생겼다.

그때 되서 계림문고 찾아 헌책방을 뒤지고 다닐 수도 없잖아.

집에 있는 추리소설들이나 읽혀야겠다 싶은
시대가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