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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캐릭터들

1998년 12월 14일

카미유 비단

적어도 내가 알아온 어떤 주인공 캐릭터와도 달랐던 모습. 이것이 내가 건담 시리즈를 통틀어 아무로와 카미유, 특히 카미유를 좋아하는 이유이다. 다른 만화의 주연급 캐릭터들도 차후 이런 모습이 많이 보이지만 (에바의 신지?) 아무래도 첫 정이라 그런지 카미유가 가장 맘에 든다.

그럼 다른 주인공 캐릭터와 뭐가 어떻게 다르다는 말인가? 대부분 옛날 로봇만화에서 주인공은 지구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멋쟁이 영웅에 불과(?)했다. 내 한 몸 부서져도 오로지 지구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에 불타는 멋쟁이 영웅. 그러나 건담의 첫 조종사인 아무로 레이에서부터 이런 개념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무로는 지구를 지키기 위해서 지온과 싸우는 멋쟁이 영웅이라기엔 과거의 주인공들에 비해서 이상한 행동을 자주 보였다. 시리즈 초창기에는 별로 두드러지지 않았으나 점점 그가 싸우는 동기는 샤아와의 경쟁심 또는 어쩔 수 없는 것 정도로 정리가 되어갔던 것이다. 지구에서는 지쳤다는 이유로 건담에 탑승하는 것을 거부했고, 샤아가 없어지자 새로운 적 란바 랄을 경쟁상대로 삼아 투지가 불타오를 무렵 건담을 다른 동료에게 맡긴다고 하자 반발하여 탈영까지 했다. 쟈브로에 도착하여 임무를 완수한 뒤 정식 군인이 되어 상사 계급을 받자(극장판에서는 소위가 되었다) “지구를 지키는 신세가 되버린 것”에 대해 어두운 표정을 짓는다. 쇠돌이나 듀크 프리드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파격적인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카미유는 어떨까? 카미유 역시 아무로처럼 우연히 전쟁에 휘말려들었기 때문인지 티탄즈를 깨부수거나 액시즈를 몰살시켜서 에우고의 권익을 찾겠다는 것에는 별 사명감이 없어 보인다. 아무로에게 싸울 동기를 부여한 것이 적군의 샤아라면 카미유에게는 어머니의 원수인 제리드가 있었다. 본격적으로 건담의 파일럿이 되갈 무렵에는 자신이 뉴타입의 실험대상으로 활용되는 것이 아닌가 회의를 느끼고, 최후에는 에우고의 샤아, 티탄즈의 시로코, 액시즈의 하만 칸에게 모두 총구를 들이댄다.

여기서 아무로를 뛰어넘는 카미유의 모습을 살펴보자. 어떤 시각에서는 못미치는 모습일지도 모르지만… 아무로는 자신에게 던져진 상황에 그럭저럭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탈영을 했지만 기습을 당한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되돌아왔고, 자신에게 주어진 무거운 책임을 고민은 했을지언정 나름대로 해결해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카미유는 거기에 비하면 매우 나약하다. 물론 전장에서 건담을 모는 모습은 강력했다. 하지만 아무로에 비하면 조직에 적응되지 못하고 개인을 좇는 경향이 강해, 에마의 위기를 직감하자 작전에서 이탈하여 기지로 돌아오고,(샤아가 양해했지만) 쟈브로에 잠입해서도 먼저 체포된 레고아를 찾는다. 지구에서 포우를 만난 이후로는 전쟁 속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해서도 회의를 느낄 정도로 흔들린다. 킬리만쟈로에서 포우를 구하기 위해 기지로 숨어드는 모습은 아무로에게서는 찾아볼 수도 없었던 과감한 행동이며, 중요한 전쟁에서 한명의 여자에게 집착해서 전선을 이탈하는 모습은 뭐 숱하다. (레고아를 쫓아서… 또 로자미아를 쫓아서…) 아무로가 세일러나 스렛가, 하야토의 위기를 보고 전선을 이탈한 적이 있나. 당근 없다.

조직 속에서 방황하는 개인의 모습. 이것이 내가 카미유를 좋아하는 이유다. 마침내 그는 자신을 찾지 못하고 의식을 잃은 식물인간이 되어버렸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 바로 카미유가 자신을 바로 찾은 모습이 아닌가 내맘대로 생각해본다.


란바 랄

어떤 의미에서는 카미유와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캐릭터이다. 조직의 일원이며 그 안에서 절대 방황하는 법이 없는 굳건한 모습. 자신이 속한 조직으로부터 버림받다시피 되어 맨몸으로 임무를 완수해야할 지경이 되었는데도 군소리없는 사나이. 진짜 군인이다.

상식적으로 카미유를 좋아한다고 내가 주장한 이유와 정반대로만 매치되는 사람을 내가 또 좋아한다고 주장하면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미친 놈 아냐 이거?” 바로 보셨다.

만약 지온이 아군이고 연방이 적군이었다면 란바 랄처럼 매력있는 캐릭터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 이 경우였다면 나는 란바 랄을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멋있기만 한 주인공 캐릭터에게 나는 흥미없다. 그러나 란바 랄이 적군이기 때문에 상황이 달라진다. 적군이지만 꼭 주인공처럼 행동하는 놈. 게다가 별 가당치도 않은 이유로 자신의 지원군이 되어줘야할 마크베가 보급을 안해주는 바람에 위기에 빠지지 않는가. 그런데도 불쌍하리만치 고집을 세우는 이 캐릭터를 보면서 대단한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작전 실패를 깨닫고서 수류탄과 함께 자폭해버리는 비장함까지. 사랑하는 아내까지 과감하게 저버리고 군인답게 죽을 수 있는 사나이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죽어도 저렇게 행동할 수도 없고 할 생각도 없지만, 멋지다는 것만큼은 인정해야 했다. 적어도 내가 란바 랄을 보면서 느꼈던 건 사람이 구차하게 살 필요는 없다는 점이랄까, 그렇다고 바보같이 살지는 말자는 점이랄까, 뭐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