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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언일병 구하기] 휘날리는 성조기

1998년 9월 21일

영화보다가 막판에 뒤통수 맞고 나오기는 이 영화가 처음이었다. 뜬금없이 펄떡거리는 성조기가 1분 이상 화면에서 떠나지 않을 때, 젠장 1분 먼저 일어나버릴걸 하는 후회가 가슴 절절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시작은 참 좋았다. 빗발치는 총탄 속에서 우습게 죽어가는 병사들, 그 죽어가는 모습도 지나치게 리얼해서 몇몇 기지배 관객들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할 정도였다. 그 뒤를 이어서 관객들에게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사령관의 어처구니 없는 명령이 이어졌다.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여덟 병사들이 사지로 내몰려졌고, 결국 하나하나 죽어갔다. 오랜만에 전쟁의 참혹함을 담담하게 보여준 영화로 자리매김할 뻔도 한 영화였다.

물론 곳곳에 흥행을 위한 무리한 장치는 보인다. 비록 정예로 뽑았다고는 하지만 신기에 가까운 저격술이 돋보이는 명사수 잭슨이나, 그런 상황에 따라붙어 다니기에는 너무나도 불쌍해보이는 행정병 업햄의 존재가 그랬다. 마지막에 라이언을 데려가기 위해 여섯 사람이 남아서 싸우는 것도 약간의 무리였지만 극의 흐름상 그것은 어느 정도 필연성이 있었고, 마지막에 라이언 일병과 함께 싸우는 전쟁 장면이 불필요하게 길었다는 나와 영화를 같이 본 어떤 사람의 지적도 타당성이 있었다. 그러나 어차피 다큐멘터리가 아니고 영화이니까, 그 정도의 무리는 봐줄 수 있지 싶었다.

그런데 젠장, 마지막에 라이언이 경례를 하는 장면에 오버랩된 그놈의 성조기는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내 생각으로는 내가 미국인이었다면 그 장면은 엄청난 의미를 담고 내 가슴 속에 파고들었을 것 같다. 혹시 소리가 작았거나 내가 워낙 기분이 나빠서 놓쳤다면 모르되, 미국 국가라도 그 장면에 울려퍼졌더라면 그 감동은 더욱 생생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한국인이고 극장도 한국 극장이었다. 수입사측에서는 리얼리티가 살아 숨쉬는 전쟁 장면은 잔인하다고 몇 분 짤라먹었다던데, 야마 뻗치게 만드는 막판의 성조기 장면은 왜 안 짤라버렸단 말인가. 그냥 라이언이 경례하는 장면에서 영화를 맺었다고 해도 한국 관객들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을텐데.

물론, 별 의미가 없더라도 감독이 고심해서 고른 라스트씬을 함부로 짜르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봤을 때, 그 라스트씬은 스필버그가 잘못 선정했다. 내가 그 성조기를 본 순간 지금까지 리얼하게 느껴져왔던 전쟁의 참혹함이 갑자기 정당화되는 것을 느꼈다면, 미국이 우리가 이런 희생을 치러가며 세계를 지키고 있다고 관객들에게 뻐기고 있음을 느꼈다면, 그것은 2시간 넘게 영화에서 강조해온 그 휴머니즘과 분명히 다른 것이다. 스필버그가 그러한 의도로 그 장면을 집어넣지 않았다고 해도 그런 오해를 부를 수 있는 장면이라면 영화의 주제를 살리기 위해서 삭제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미국인들은 느낄 수 없는 민감한 문제이므로 미국에서는 아무 논쟁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다른 나라에서도 이런 문제를 짚어보지 않는다는 것은, 뻐기고 있는 미국에게 무릎꿇고 헤헤거리는 비굴함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