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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삼례이야기] 배삼례와 오소리

1998년 2월 1일

본인의 군대시절 이야기에서 통제실장이었던 오소리에 대해서 얘기했었는데 대가리 수준이 비슷해서 그런지 오소리와 삼례는 궁합이 잘 맞는 편이었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사이가 좋았다는 건 아니고, 통제실장으로서 대대 2인자였던 오소리는 대대 업무를 전산화하겠다는 내가 생각하기에는 말도 되지않는 한가한 야망을 품고 있었고, 삼례는 자신이라면 대대 업무를 전산화할 수 있다는 되먹지 않은 착각에 빠져있었던 것뿐이다. 멍청한 오소리는 삼례의 얼토당토않은 컴퓨터 실력 자랑을 곧이곧대로 믿고 있었고, 잔대가리를 굴리는 삼례는 오소리를 잘 꼬드겨서 귀찮은 우리 사무실 일거리는 나한테 맡기고 만만해보이는(순전히 삼례 생각이지 전혀 만만한 일이 아니다) 업무 전산화 일이나 하면서 자료수집을 핑계로 특박이나 나가는 등 말년을 편하게 보내보자는 궁리만 하고 있었다.

그리하야 오소리가 삼례에게 내린 첫번째 특명은 “대대원 월급 자동계산 시스템”이었다. 오소리의 꿈은 관리처 및 지원대와 랜으로 연결하여 그 쪽에서 데이터를 입력하면 대대 행정계는 사병이 매달 손가락 아프게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아도 월급이 척척 계산되어 나오는 시스템이었지만 그건 공군본부 차원에서 추진해야할 대규모 사업이고, 삼례가 만들어야 할 수준은 끽해야 계산기를 두드리던 것을 컴퓨터에 입력시켜서 계산만 자동으로 해주면 끝나는 수준이었다. 솔직히 프로그램이랄 것도 없고 스프레드시트만 잘 활용하면 되는 수준이다. 그러나 삼례는 자신이 다룰 줄 아는 유일한 언어인 디베이스로(이것도 프로그래밍언어라고 할 수 있다면) 프로그램을 짜기 시작했다. 나몰래 책까지 훔쳐보면서(나한테는 눈감고도 하루면 만들 수 있다고 큰소리 꽝꽝 쳤으므로) 일주일 가까이 걸려서 만든 게 메인 화면이었다. 그것도 디베이스 아래에서 돌아가는 프로그램이라 텍스트모드를 사용했기 때문에 촌스럽기 그지없었다.(그래도 오소리는 감탄하더군.) 가능성을 보았다고 생각했는지 오소리는 삼례를 격려했지만 아쉽게도 거기까지가 삼례의 한계였다. 정말로, 그 날 이후 삼례는 제대하는 그날까지 거의 서너 달이나 되는 시간동안 단 한 줄의 소스도 추가시키지 못했다. 1번 2번을 선택하면 자료 입력 프로그램이니 자료 계산 프로그램이니를 부르는 화면만 띄워놓고 선택해봤자 아무것도 실행이 안되는 껍데기만 만들어놓고 중지된 것이다.

오소리가 머리 나쁘다는 얘긴 숱하게 했지만 오소리나 삼례나 월급계산 프로그램의 메인화면에 너무 만족한 나머지 삼례를 다그칠 생각도, 프로그램을 더 손질하겠다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일이 터진 것은 삼례가 제대하는 전날이었다. 갑자기 생각이 났는지 우리 사무실로 온 오소리는 나한테 배병장이 어디 있냐고 물었고, 내일 제대라 제대 교육을 받고 있을 거라는 말을 듣더니 그럼 배병장이 짜던 프로그램은 어딨냐고 물었다. 나는 얼른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을 했다. (하긴 배병장도 제대교육을 받기는커녕 내무반에서 쿨쿨 자고 있었겠지만) 아니나다를까 배병장은 업무시간이 끝나자마자 오소리의 호출을 받아 사무실로 똥빠지게 내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마침 당직병이었던 나는 내무반을 지키느라 삼례가 오소리한테 깨지는 꼴을 보지 못하게 되어 조금 서운했었는데, 점호시간이 다 되도록 올라올 생각을 하지 않아 야근 중이던 옆 사무실 남일병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전화기를 통해서 왠 개짖는 소리가 월월월월 들리는 게 아닌가. 남일병에게 확인해본 결과 오소리가 삼례를 야단치는 소리였다. 아마 오소리는 삼례보고 지금 당장이라도 프로그램을 완성해보라고 독촉하는 모양인데(평소 삼례가 떠들어댄 실력으로라면 충분히 완성시킬 수 있을테니까) 삼례가 할 수 있을 턱이 있나. 아주 대판 깨진 삼례가 내무반에 올라온 시간은 거의 12시가 넘어갈 무렵이었다는데, 그래도 자기가 잘못 했다는 생각보다는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할 게다, 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