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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스드 오프] Danny Boy

2000년 8월 17일

약간 어스름한 무렵, 그러니까 해가 떨어진 직후쯤이겠다.
하나 둘씩 병원 앞으로 모여든 그림리 탄광의 브라스 밴드 단원들은, 어둑어둑해진 병원 앞에서 광부들의 모자 앞에 달린 랜턴을 켜고 “Danny Boy” 를 연주한다. 그 음악은 병원에 누워있는 그들의 지휘자, 대니에게 바치는 노래였다. 음악은 세상을 덮어가는 어둠처럼 세상을 끌어안고, 마침내는 세상을 비춘다.

상당히 작위적이고 이쁘게 만들려고 애를 쓴 노력이 돋보이는 장면이지만, (그래서 일부러 묘사도 이뿌게 할라고 노력했다. 능력이 모자라서 얼치기처럼 됐지만…) 지루한 클래식 음악의 향연에 진작 곯아떨어진 관객이 아니었다면 손수건 한 장쯤 꺼내서 눈가를 닦아 볼만한 감동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림리 탄광의 광부들. 그들에겐 탄광의 폐광 결정으로 인해 돌아갈 직장을 잃었고, 자신들을 격려하며 전국경연대회 결승까지 이끌어주었던 리더 대니는 광부들의 직업병인 진폐증으로 병원에 누운 상태였다. 생활터전이 없어져서 당장 막막한 마당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신적인 지주조차 잃어버린 아주 곤란한 상황인 것이다. 그런 절박한 상황에서 그들은 지금껏 그들을 지탱해주고 함께 있어준 트럼펫과 트럼본을 들었다. 자신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던 대니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Danny Boy”라는 노래 자체는 아일랜드 민요로 조금 구슬프다. (영국 민요들은… 하긴 우리나라 민요들도 거의 그렇지만… 슬픈 곡이 많다. “올드 랭 사인”도 그렇고, 영화 <태양의 제국>에 나왔던 “Suo Gan”도 그렇고) 어머니의 애창곡이라서 본의 아니게 어렸을 적부터 이 노래를 자주 들었었는데, 솔직히 연주로 들은 것은 이 영화가 처음이었다. 그런데 제목부터 리더 대니를 위한 노래라는 느낌을 강하게 풍기는 “Danny Boy”는, ‘나는 그대가 돌아오길 무덤에서 평화롭게 기다리겠노라’ 는 가사처럼 그저 슬프기만 한 곡은 결코 아니다. 나름대로의 희망을 담고 있고, 그 희망이 관악대의 연주로 더욱 두드러지게 표현된 것이다.

<지상에서 영원으로>라는 영화에서 주인공 몽고메리 클리프트는 친구(프랭크 시내트라)의 죽음을 애도하며 눈물과 함께 트럼펫으로 진혼곡을 연주한다. 이 영화에서 잊을 수 없는 명장면 중의 하나인데, 여기서도 드러나지만 관악기는 기본적으로 슬픈 음악 연주에 적합한 듯 하지만 힘을 담고 있기 때문에 끝부분에 묘한 여운을 남기곤 한다는 점이다. 그림리 탄광 브라스밴드가 우여곡절 끝에 출전한 결승에서 “윌리엄 텔 서곡-스위스 기병의 행진곡”을 힘차게 연주하는 것에서도 볼 수 있듯 관악대의 매력은 선 굵은 무엇, 그런 것을 표현하기에도 나무랄 데가 없다.

탄광일이라는 격한 노가다(?)와 음악이 조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관악대의 매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관악대의 매력이 가장 돋보였던 장면이 슬프고 좌절하지만 결코 쓰러지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여주는, 음악도 슬프지만 힘이 느껴지는, 병원 앞 “Danny Boy”의 연주 장면 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정도면 역시 감동 받아도 손색 없는 장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