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의 장수들



이 글은 2001년 7월에 모 사이트의 자유게시판에서 삼국지에 관한 이야기가 오갔을 때 한귀퉁이 끼어들어 썼던 글입니다. 원래 제 홈페이지의 취지대로라면 <삐딱하게 끄적거려보기>로 가야할 글입니다만 삼국지 관련 글이라 이쪽으로 옮깁니다.

삼국지의 장수들

삼국지의 최강장수를 꼽을때 간과되거나 무시되는 부분이 있는데, 최강이라는 면이 개인의 무예냐, 부대의 통솔력이냐 하는 점입니다. 다른 어느 분이 최강의 무장을 위의 두 분야로 나눠서 말씀하신 적도 있습니다만, 저는 무예와 통솔력, 두부분을 얘기하기 전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 그것부터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바로 개인의 무예와 부대통솔력 중 전쟁에서 미치는 영향은 어느 쪽이 더 높은가? 하는 점입니다. 그게 없이 단순히 누구는 무예가 높지만 통솔력이 떨어져서… 라는 식으로 얘기하면 안될 거 같아서요.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먼저 삼국시대 당시의 전쟁방식을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사 박사과정에 계신 분도 있다는데 이거 잘못 나서면…^^;) 고대 중국소설을 보면 “보검”이라는 표현이 심심찮게 나옵니다. 뭐 과장이 섞였겠지만 쇳덩어리도 두부자르듯 잘라버린다는 둥, 사람목도 갈대베듯 한다는 둥 하는데, 요즘처럼 합금이나 제련기술이 발달한 시대에도 그런 칼은 참으로 만들기 힘들죠. 제가 보기엔 그 “보검”이란 아마 요즘 기준에서 매우 잘드는 칼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당시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상태에서 모든 병사들이 그렇게 날이 잘 서있는 창칼로 무장했다고 보기 힘들기 때문에,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제법 잘드는 칼은 쇳덩어리도 자를듯 경이롭게 보일 수 있겠지요.

또한 삼국지 초반의 전란기에는 대부분의 병사들이 체계적인 훈련도 받지 못하고 무장도 제대로 못한 병사들일 겁니다. 게다가 그들이 들고 있는 창칼이라는 것이 사람을 베고 찌르는 것보다 때려죽이는^^; 용도에 더욱 적합하다면, 그들 무리의 한가운데로 완벽한 무장을 갖춰서 일반 병사의 때려죽이기용^^; 창칼은 전혀 통하지 않고 오히려 무장안한 병사들은 보리베듯 할 무기를 갖춘 장수가 한명 (그것도 말을 타고!) 뛰어든다고 가정했을때, 그 파괴력은 엄청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삼국지 초반에 있어서 전투라는 것은, 적어도 병사의 수가 비슷하다고 가정했을 경우 (물론 조금이라도 훈련이 되있거나 장수의 무예가 아주 뛰어났을 경우 병사의 숫자는 쉽게 무시될 수 있겠지만) 부대를 이끄는 무장의 무예에서 판가름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때 활약했던 무장들은 대부분 부대의 통솔력보다는 개인의 무예로 이름을 얻었던 경우가 되겠습니다.

저는 여포가 바로 무예로 이름을 얻은 전형적인 케이스라고 봅니다. 일반 병사들의 훈련도와 무장이 강화되면서 자연스럽게 여포에게는 무예보다 통솔력이 요구되었지만, 거기에서 한계를 드러냈다고 보는거죠. 물론 여포의 병력이 조조-유비의 연합군에 비해 부족하기도 부족했고, 거의 유일한 모사인 진궁의 말을 듣지 않은 탓도 있지만… 병력을 모아 훈련시키고 모사의 말을 경청하는 것도 통솔력이라고 본다면 여포에게 부족했던 것만큼은 틀림없죠.

관우-장비도 그런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황건적을 치는 등 무예가 우선하던 시절 이름을 얻은 것이 사실이니까요. 그런데 그중 특히 통솔력은 떨어지고 단순무식한 장수로 꼽히는 장비부터 언급하면, 서천을 치러 갈 때 장비가 엄안을 사로잡는 등 활약을 보이는 것은 장비가 그렇게 단순무식한 장수는 아니라는 반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찌 보면 장비는 단순무식한 장수라기보단 성정이 급하고 다혈질인 장수라는 표현이 더 맞는 것 같습니다. 여포의 전성기에 그와 맞설 수 있었던 몇 안되는 장수이기도 했었지만, 통솔력이 우선하던 시대에도 그의 가치가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죠.

관우에 있어서 여러가지 평가가 분분하는 이유는 그의 무예가 연의에서 일관되게 과장되고 미화되고 있다는 의혹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실제 관우의 활약 중 화웅의 목을 벤 것도 사실이 아니고, 안량을 벤 것은 사실이나 문추를 벤 것은 사실이 아니고, 오관돌파하며 여섯장수를 벤 것도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정사에 없는 얘기임)

그러나 다른 분이 쓰셨듯 관우는 무예로보다 의기로 더 이름을 얻은 장수라는 점에서 관우의 무예를 폄하하는 것이 관우를 장수로서 깎아내린다고 볼 수만은 없는 것이죠. 실제로 유비가 십여년을 자기 세력도 얻지못하고 객장으로만 떠돌던 시절 그가 자기 사람 중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었던 장수가 관우라는 점에서 과연 그렇게 관우가 형편없는 장수였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유비가 그 험한 세월을 살아남은 것은(운이 좋아서였을 수도 있지만) 관우와 장비, 특히 관우라는 무장의 힘에 의지한 것이라고 봤을 때 적어도 위에서 말했던, 적부대 중심으로 뛰어들어 혼자 힘으로 적을 궤멸시키는 능력에 있어서 관우를 평가절하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또하나, 삼국지를 게임으로 많이 접한 사람들이 쉽게 범하는 오류가 바로 “일기토능력”이라는 것에 대한 맹신입니다. 분명한 것은 일대일 대결에서 여포를 이겨본 장수는 전혀 없었다는 것이지만, 관우는 방덕과 비기고 장비는 마초와 비기고 그러니 둘은 비슷비슷하고 어쩌고저쩌고… 이런 식의 묘한 승패표(?)를 만들어 장수의 능력을 비교하는 것인데 솔직히 우스운 일입니다. 오늘날의 스포츠 경기에서도 전력상 열세인 팀 또는 선수가 우세한 팀 또는 선수를 꺾는 일은 비일비재하며, 99명에게 강한 선수가 단 한명에게 힘들어하는 징크스도 있습니다. 관우가 방덕을 이기지 못한 것으로 봐서 관우의 무예는 별로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단순한 논리가 통하는 곳이 싸움터였던가요? 아니옵니다.

말나온 김에 잠깐 방덕에 대해서 언급하지요. 방덕에 대해 아래 글 중 무식한 장수, 무명의 장수라는 식의 평가도 있는데 마초가 장안성을 점령하고 조조를 밀어붙이던 당시 실질적인 마초의 모사는 방덕이었습니다. (장안성을 떨어뜨린 계교는 방덕에게서 나왔죠) 그리고 조조가 방덕을 계교로 사로잡을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방덕이 조조의 맹장 하후연, 서황, 장합, 허저와 맞싸워 전혀 밀리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방덕이 관우에게 쉽게 목이 떨어져 마땅한 무명장수는 절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두고 싶습니다.

다시 관우 얘기로 돌아가면 아무리 연의에서 과장되고 미화되었다고 해도 연의가 작성된 시점에서 이미 관우가 신처럼 떠받들렸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요. 연의의 내용 대부분이 작자의 창작이 아니라 당시 떠돌던 이야기의 모음집이라는 측면에서도 그렇고. 그럼 객관적으로(정사에서) 무예도 뭐 그냥 그런 관우가 신격화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유비의 오른팔이라서? 억울하게 죽어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귀신은 영험을 발휘한다는 무속신앙이 있지요) 그것보다는 정사에도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는 두가지 사실에 더 무게를 두고 싶습니다.

첫번째는 오관참장은 아니더라도 조조의 휘하에서 좋은 대접을 받았던 관우가 유비의 소식을 알자 돈도 버리고 벼슬도 버리고 의지할 곳도 없는 행님(?)을 찾아 떠나는 대목입니다. 평범한 사람은 흉내도 낼 수 없는 행동이요, 관우라는 인간에 대해서 두번 돌아보게 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지요. 장료나 장합, 서황, 감녕, 엄안, 황충, 태사자 등이 비슷한 과정을 거쳐 주인을 바꾼 것에 비하면 관우는 한층 빛이 납니다.

두번째는 형주를 지키던 관우가 번성을 공격하며 승승장구하자 조조가 수도를 옮기려 했다는 점입니다. 크게 보아 평생 조조에게 위협이 되었던 몇 안되는 장수 중에 관우가 꼽힌다는 점이라고 말씀드릴 수도 있겠네요. 이 역시 무예가 우선하던 시절에도 이름을 날렸지만 관우의 통솔력 역시 대단했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관우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장수에 대해선 할말이 아직 한참 많습니다) 언급할 것은 김영걸님이 말씀하신 동묘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원군으로 참석한 이여송? 진린? (모 기록에 진린으로 나오는데 진린은 수군대장이었으니까 이여송일 것 같습니다) 하여튼 그런 장수가 꿈에서 관운장을 만나고 위기를 탈출한 후, 조선왕에게 니들은 관운장 덕분에 위기를 면했으니 (다시 말하면 관운장이 현몽해준 내가 살아나서 너희를 구해주었으니) 관운장을 모시는 사당을 지어라… 라고 말해서 지은 것이 동묘, 북묘, 서묘, 남묘의 네개 사당입니다. 지금 동묘의 위치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각각 서울의 4대문 바로 인접에 모셔진 사당이죠. (지금은 동묘와 남묘만 남아있습니다) 제가 알기로 동묘는 지금 국보, 아니면 보물, 아니면 사적입니다.^^; (국보인 거 같은디…^^;) 공원으로 조성되어있는데 몇년전까지 입장료 무료였구요, 가보면 이상한 무속행사가 벌어지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고 그래서인지 사진촬영 금집니다. (그러나 제 후배는 사진을 찍는데 성공했습니다) 사당 내부에는 당연히 관운장 상이 (조금 무섭게 만들어진) 서있고
관평이 한수정후의 인수(도장)를, 주창이 청룡언월도를 들고 좌우에 시립해 있습니다. 재밌는 것은 장비와 유비도 마치 관우의 꼬붕인양 좌우로 도립해있다는 점이죠. 그밖에도 여러 장수의 상이 있는데 관계자(? 그냥 지나가던 아는척하던 아저씨였음)의 말에 따르면 여포도 있고 조조도 있다고 합니다. 믿거나 말거나.

담은 fucks님이 첨에 높게 평가했다가 순위가 많이 떨어진 장료에 대해서 얘기해볼까요. 장료를 평가함에 있어서 늘 얘기되는 부분이 합비대전인데 사실 여기서 장료가 돋보였던 부분은 무예라기보단 통솔력입니다. “나관중도 몰랐던 삼국지 이야기”라는 책에 보면 장료가 합비대전에서 혼자의 힘으로 전세를 돌려놓았으나 조운은 장판파에서 자신의 힘으로 전세를 돌려놓지 못했으니 장료가 더 윗길이다, 라는 말이 나옵니다. (fucks님이 삼국지를 논하는 논리가 이 책에서 많이 인용된 것 같던데요. 이 책을 보지 않으셨으면 월간조선을 보셨거나) 그런데 조운에 대한 비교를 떠나, 장료의 무예가 뛰어났기 때문에 합비대전의 전세를 돌려놓았다기 보다는 당시 조조의 군세가 이미 우세했다는 점이 더 정확한 사실입니다. 국지전에서 빠른 기병대로 적진을 우롱하는 일은 장료 정도의 무예를 갖춘 장수라면 누구라도 가능한 일이고, 전반부 여포의 부장이었던 시절보다 후반 조조의 군세를 등에 업은 후 이름을 날린 것을 보면 역시 장료는 무예로 승부하는 장수라기보단 통솔력에 더 점수를 줘야되겠지요.

무균질장수(?) 조자룡은 어떨까요. 저 개인의 견해로 적진을 개인기로 뚫고 나가는 능력은 누구 못지 않다고 봅니다. 공손찬을 원소의 대군으로부터 구해낸 싸움이라거나 (이것 역시 과장/미화의 소지가 있음) 장판파(이것 역시 과장/미화가 있음) 싸움 등에서 보여준 눈부신 실력은 이미 공인 받은 것이죠. 단 한번도 진 적이 없다 (싸움에서 밀린 적은 있으나 패장이 되어 돌아온 적은 없습니다)는 경이로운 사실에 이르면 더욱…
그러나 조자룡은 통솔력이라는 점에 이르렀을 때 제갈양의 지시에 충실히 따랐기 때문이라는 점을 더 주목하고 싶습니다. 숱한 싸움에서 조자룡이 자신의 판단으로 전투를 승리로 이끈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의 전투에서 제갈양의 지시를 충실히 따라 승리를 일궈냈지요.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저는 조운을 통솔력보다는 개인기량이 더 뛰어난, 그러나 자만심 등으로 실수하는 일이 없었던 장수로 평가하겠습니다.

마초에 대해서 높게 평가하는 사람과 낮게 평가하는 사람이 많은데 제 개인적 의견으로 마초는 역시 무예가 우선하는 장수입니다. 지략이 있다거나 뛰어난 통솔력이 있다고는 보기 힘들지 않은가 생각하는데 실제 힘으로 밀어붙였을 때는 조조를 거의 잡을 뻔 했지만 지략에 말려 서량으로 쫓겨가야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유비에게로 온 후 관우가 지키던 형주만큼이나 중요한 지역이던 한중을 지키며 들어앉는 바람에 눈에 띄는 활약(일명 A매치)을 보여주지도 못했고, 결국 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마초의 뛰어난 통솔력이 발휘된 부분은 연의상에서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죠. 장비나 허저와 대등하게 싸웠던 부분은 남아있으므로, 그가 여포시대에 살았다면 좀더 훌륭한 공적을 쌓았을지도 모르겠지만… (참고로 마초의 아버지인 마등이 한족과 강인의 혼혈아이므로, 마초도 상당한 우성인자를 많이 갖구있는 놈이라 할 수 있겠죠. 강인이라면 대충 카자흐, 러시아 쪽에 가까운 사람들이라 볼 수 있으니 백인에 가깝지 않은가요?)

조조의 장수들에 대해 서열을 매기면 장료를 높게 치는 경우가 있고 하후돈 하후연을 높게 치는 경우가 있는데, 조조의 장수들에 대해 공통된 점은 무예보다 통솔력을 높게 쳐주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조조의 부대가 가장 안정적인 상황에서 지속적인 훈련을 할 수 있었고, 병력의 수적 우세 역시 오나 촉보다 월등했다는 점에서 굳이 위험하게 무예만을 앞세울 필요가 없었지않겠느냐, 는 생각입니다. 완력으로는 역시 전위와 허저겠지만 하후돈도 그에 못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조홍의 무예도 상당히 뛰어나고 서황이나 장합 역시 통솔력보다는 무예가 약간 앞서는 장수들이 아닌가 싶지만 연의상에서 그렇게 두드러지진 않습니다. 허저는 용맹이 뛰어나긴 하지만 군 통솔력 등에서 확실히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조조 등이 출전한 싸움에 부장으로 나서거나 한 적은 있어도 직접 대군을 몰고 나간 적은 없습니다) 조조의 장수들이 금포를 걸고 벌인 활쏘기 시합에서도 금포를 차지한 서황에게 힘으로 달려든 것으로 볼 때 힘 빼면 별로 아닌 장수였는지도 모릅니다.

관우에게 너무 쉽게 쓰러지는 바람에 평가가 바닥을 기는 안량 문추는 어떤 면에서 억울한 장수들일테죠. 전반부 조조를 가장 위협했던, 아니 사실 조조보다 더 큰 세력을 갖고 있었던 원소가 손꼽는 무장이었다면 적어도 관우, 장비와 필적할만한 무장이었음은 분명합니다. 그런 안량이 관우에게 너무 쉽게 죽었다는 사실 때문에 일부에서는 관우의 적토마가 뛰어난 탓이라느니 안량이 관우를 알아보고 방심하고 있었다느니 하는 설을 흘리고 있는데, 진실이야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안량은 관우가 그때까지 쉽게 베어넘기던 장수들과 격이 다른 장수임은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나라의 장수들도 많이 낮게 평가되는데요. 이른바 A매치가 없었기 때문이라지만 능통은 장료에게 밀리지 않았고, 감녕은 조홍에게 밀리지 않았으며, 정보도 태사자, 장료와 맞섰고 태사자는 장료, 손책과 싸웠었지요. (사람들이 잘 모릅니다) 오나라 역시 잦은 싸움에 휘말리지 않았기 때문에 병사를 정비하고 훈련할 시간이 많았다는 점에서 장수의 무예에만 의존하는 전술을 구사할 이유가 별반 없었을 거라는 사실을 감안해줘야겠죠. 단순히 무예만을 앞세우지 않는다면 조조의 대군을 적벽에 수장시킨 주유만한 장수가 삼국지에 또 어디있겠습니까? 그리고 손견부터 3대를 도와 오나라의 기반을 마련한 정보와 황개도 물론이고.

이 시점에서 삼국지의 인기가 팍 떨어지는, 제갈양 사후의 무장들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가고 싶은데요. 먼저 강유가 있죠. 제갈양의 병법을 전수받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무장입니다. 이미 판세가 굳어진 삼국시대 후반부라 무예만을 우선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개인기를 발휘하지 않았던 것뿐이지, 무예가 떨어지는 장수는 아니죠. 제갈양 사후 거듭된 실패는 촉한의 병력이 워낙 불안한 탓이었고.

촉한을 멸망시킨 장수 중 문신에 가까운 종회말고 등애는 진짜 무장이죠. 강유의 중원정벌을 번번이 무산시킨 장수로 역시 강유와 비슷한 이유 때문에 무예가 돋보일 수 있는 장수는 아니었습니다. 여포와 비슷한 시대를 살았다면 어떤 식으로 평가받을지… 궁금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지력을 갖춘 여포급이 아닐까 싶어서…)

이것으로 글을 마치려는데 fucks님이 제갈양은 관우를 제거하려했다는 설을 다시 올렸네요. 항간에 널리 퍼지고 있는 설로 특히 일본계 삼국지 학자들이 집착하는 설입니다. 이문열과 고우영 삼국지에서도 언급된 바가 있습니다. 한마디면 충분한데… “다들 지같은 줄 아나?”

제갈양이 관우를 견제했을 수는 있습니다. 비록 꾸며낸 이야기지만 관우가 화용도에서 조조를 살려주는 대목, 이 사건을 통해서 제갈양이 관우에게 우위를 점했다는 논리를 이문열 삼국지에서 봤는데, 다시 말하지만 그 사건은 픽션입니다. 있지도 않은 사건으로 제갈양이 관우에게 우위를 점하고 어쩌고를 따질 이유는 없지요. 그러나 실질적인 2인자로 있었던 관우를 제갈양이 견제했을 가능성까지 배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째 관우의 성정을 보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평생 춘추를 읽으며 (혹은 춘추만 읽으며) 인과 예에 집착했던 관우는 일설에 따르면 유비의 나이가 어린데도 그를 형으로 주군으로 받들었으니 제갈양의 나이가 어려서 그를 무시했다는 것은 (더군다나 제갈양의 능력이 입증된 이후에도) 납득하기 어려운 사실이며, 아무리 자존심이 높다한들 위계질서를 어겨가며 관우가 제갈양에게 맞설 이유도 없습니다. 물론 실제로 관우가 제갈양의 명령을 어긴 적이 없다는 점도 덧붙이죠.

이 대목에서 항의가 예상되는데 제갈양이 관우에게 형주를 맡기며 손권과 친하게 지내라는 지시를 관우가 어겼다는 점을 지적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제갈양은 형주를 지키기위해 손권과 친하게 지내라고 한 것이지 형주를 내줘가며 손권과 친하게 지내라고 한 것은 아니며, 호시탐탐 형주를 노리는 오나라에게 관우 정도의 대응은 매우 적절한 것으로 보입니다. (어떻게 보면 관우의 그러한 대응은 충분히 예측 가능했을지도)

또한 무릉계양영릉장사 4군을 손권에게 돌려주라는 명령을 관우가 거절했다는 대목이 연의에서 나오는데 실제 정사에서는 관우가 좋아했는지 어땠는지는 몰라도 돌려줬습니다. 그러니까 오나라는 4군을 차지한 이후에도 계속 형주를 노린 거지요. 어떻게 보면 촉한은 손권과의 유대를 끊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나라는 관우의 뒤통수를 쳐버린 것입니다.

둘째 형주의 중요성을 방관하고 있습니다. 삼고초려로 유비와 마주한 제갈양은 천하삼분의 계책을 밝히는데, 거기에서 분명히 형주를 거점으로 서천을 차지하여 한중과 형주를 통해 허도를 압박하는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유비가 중원을 차지하는데 거점이자 최고의 전진기지가 다름아닌 형주였다는 거지요. 그렇지 않다면 당장 손권과 손잡는 것이 훨씬 중요한 시점에서 유비가 형주를 꽉 붙잡고 놓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관우의 죽음은 촉한에서 유능한 장수 하나가 죽었다는 사실보다 형주라는 요새를 잃은 것이 훨씬 더 큰 타격이었던 것이죠. 형주를 잃는 바람에 제갈양은 군사를 두갈래로 나누지 못하고 지겹도록 기산을 공격하며 중원을 노리는 지구전을 써야만 했고, 그것이 결국 제갈양의 목숨까지 단축했다는 점에서 형주를 잃은 순간 제갈양의 삼국통일의 꿈은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제갈양이 관우의 죽음을 방관했다는 주장은 결국 제갈양이 중원 정벌에는 관심도 없고 그저 라이벌 하나 없애는 것에 집착하는 쫌생이였다는 전제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럼? 왜 관우를 구해주지 않았나? 그것은 제갈양이 관우가 위기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고도 구해주지 않았다는 전제가 먼저 필요하죠. 그러나 관우가 위기에 빠졌을 때 유봉-맹달이 원군을 보냈으면 적어도 성도에서 원군이 출발해 (중국 넓습니다… 성도에서 형주까지 거리는 못해도 평양에서 부산까지는 될텐데…) 관우를 구해줄 때까지 버텨줄 수는 있었겠지만 유봉-맹달은 원군을 보내지 않았죠. 제갈양이 정말로 천리안이라도 갖고 있으면서 관우가 난데없이 여몽에게 뒤통수를 맞고 형주를 빼앗긴 뒤 유봉-맹달에게서도 원군을 받지 못할 것을 다 알면서도 군사를 보내지 않았다면야 관우의 죽음을 방관한게 아닌가? 라고 의혹을 던질 수 있겠지만 제갈양은 그렇게 초능력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코에이사 식으로 삼국지를 분석하는거 짜증나는 사람인데… 지력순위니 무력순위니 이런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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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Response

  1. f 말해보세요:

    수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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