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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세기 건담만 건담인가?

2004년 11월 14일

“새로운 건담 시리즈”로 각광(?)을 받았던 <기동전사 건담 시드>가 종영했는가 싶더니, 어느새 <건담 시드 데스티니>라는 이름으로 2부(?)가 또 방영되고 있는 모양이다. <신기동전기 건담윙>부터 건담팬이 된 사람은 물론, 소위 올드 건담팬으로 분류되는 사람들 중에도 <시드>를 보는 사람은 있는 것 같다. 간혹 나도 여기저기 서핑하다가 <건담 시드>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글쎄 한번 볼까?’ 하는 생각이 들긴 드니까.

결론부터 내리고 가면 “기왕 봤으면 욕하지 말자”. 시간 들여 돈 들여 (돈 안들이고 보는 방법도 뭐 얼마든지 있다만) 봤으면 그게 아까와서라도 욕하지 말자. 정말 참을 수 없이 욕이 나온다면 그건 본 사람이 <건담 시드>에서 뭔가 다른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 아닐까. 만들어서 보여주는 사람이 의도하지 않았던 것을 혼자 기대해놓고 이러이러한 것이 빠져있다고 욕하지 말자. 이런 이야기다.

그럼 내가 왜 이런 결론을 내리고 있는지 주절주절 늘어놓아보자. 먼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계실 분들에게는 사족이나 다름없겠지만 굳이 얘기하자면 나는 우주세기 건담팬, 소위 <샤아의 역습>까지만 건담으로 인정하고 있는 건담팬이고, 그 중에서도 특히 소위 <퍼스트건담>과 <제타건담> 쪽에만 심취해있는 사람이다. <빅토리 건담>도 우주세기고 <F91>도 우주세기이긴 하지만 그 쪽은 인정하지 않는 건담팬이라는 얘기다. 얼마전 게시판에 올라왔던 “건담팬의 성향분류”에 따르면 우주세기파의 일부(빅토리나 F91을 인정않는)에 속한다고 볼 수도 있다는 말이다. (내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갖다붙이기는 그 부류가 가장 낫다)

그렇지만, 나를 비롯한 수많은 소위 “우주세기파”들이 우주세기에 속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헤이세이 건담들을 까대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런 사람도 있고, 주류처럼 보일 수도 있다. 아니 주류일지도 모른다. 고로 여기서부터 하는 이야기는 나, 그리고 나를 포함한 비슷한 부류에 한정된 조금은 주관적인 이야기임을 미리 밝혀둔다) 하긴 현상적으로만 보면 ‘우주세기에 속하지 않았으니까’라는 이유도 맞기는 맞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현상을 그대로 놓고 설명한 것에 불과하고, 그것이 동기는 아니라는 말이다. 그럼 헤이세이를 까대는, 점잖게 표현해서 건담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앞서도 말했지만 이것은 나만의 주관적인 이유일 수 있다) 기존의 <건담 시리즈>가 갖고 있었던 세계관, 소위 우주세기 세계관이라는 것이 그때까지 존재해왔던 슈퍼로봇물과 달랐다는, 단순히 다르다는 수준이 아니라 한단계 진보적인 세계관이었다는 믿음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내가 슈퍼로봇의 잔재가 상당부분 남아있는 퍼스트보다 (물론 그것이 퍼스트의 실책이라기 보단 시대적 흐름에서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은 인정한다) 상당히 혁신적인 구도로 나왔던 제타건담 쪽을 더 좋아하는 것이고, 일반적인 우주세기 팬들에게는 엄한 설정과 뜬금없는 애들 장난으로 욕먹는 <0080>을 내가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0083>도 마찬가지)

그렇다면 나머지는 내가 굳이 입아프게 설명하지 않아도 대충 선을 그어볼 수 있을 것이다. 세계관 따위는 장풍으로 날려버렸는지 흔적조차 없는 <기동무투전 G건담> 따위는 내가 염두에 둘 필요도 없는 것이다. 꽃돌이 5인방이 나서서 설치는 <건담 윙> 같은 경우는 그냥 때깔 고운 옆집 창녀 보듯 봐버리면 그만이다. 여기까지는 대략 쉽게 선이 그어진다.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보자. 빅토리는? F91은? 건담 X는? 턴에이는? 건담 시드는? 여기서부터의 분류를 위해서 소위 “우주세기 세계관”이 대체 무엇이냐를 엄밀하게 정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그런 거 엄밀하게 정의하기 귀찮다. 솔직히 왠만한 건담팬이라면 머리 속에 대충 다 들어가있는 내용들이다. 도대체 무엇이 우주세기 세계관인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것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이렇게해서 다음 칼럼 주제를 하나 확보하는 것이다 ^0^) 여기서는 짧은 문장 하나로 아직 무엇이 우주세기 세계관인지 깔끔하게 정리하지 못한 건담팬들에게 간단한 해답을 주도록 하겠다.

“지온이 등장해야 진정한 우주세기 세계관이다.”

쉽게 동의할 수 없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그렇다. 엄연히 적군임에도 불구하고(다른 칼럼에서도 유사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만 타이틀롤인 건담이 지온편에 선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0083은 아주 살짝 예외적인 경우), 시리즈 중 한 편(외전)에서는 당당히 주인공이기도 했고, 건담을 직접 조종한 역대 주인공들보다 훨씬 인기가 많은 샤아 아즈나블이라는 캐릭터까지 갖고 있는 지온. 만약 건담팬들을 설문조사해서 분류해본다면 연방팬 반 지온팬 반으로 나뉠 거라는 점 십분 동의하시리라 믿는다. (이 세상 어느 애니메이션에서, 틀림없는 적군이 그만큼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을까? 있다면 아무나 하나 집어들어 보여주시라) 바로 이러한, 적군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인기를 안고 있는 지온의 존재야말로 우주세기 세계관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예인 것이다. 적은 적이지만 미워할 수 없는, 내가 싸우는 이유는 적을 무찌르기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에 벌어지는 어쩔 수 없는 상황 상황들. 그런 모든 것을 아우르는 존재가 바로 지온이라는 것이다. 자, 그럼 앞서 이야기했던 분류가 무척 간단해졌다. 지온이 등장하지 않는 빅토리, F91, 턴에이, 시드 모두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이제 내가 처음에 내렸던 결론, “기왕 봤으면 욕하지 말자”로 돌아가보자. 시드에 건담은 나올지 몰라도 지온이 안나온다는 건 상식적인 얘기다. (뭐 유사한 건 나온다고 하더라만… 그래서 아직 시드에 기대를 갖는 올드건담팬이 있는지도 모르고) 지온이 안나오는 건담에는 애초에 큰 기대를 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기대를 갖고 본 것은 당신 잘못이니까 욕하지 말라, 그런 이야기 되겠다. 말이 좋아 <기동전사 건담>이지, <지온공국 항쟁사>라고 제목 바꿔도 인기는 무병장수할 거다.

“지온이 등장해야 진정한 건담이다.”

이게 오늘의 진짜 결론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