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의 후계자 – 강유



강유

천수 기현 출생으로 자는 백약(伯約). 천수 태수 마준의 부하로 있다가 제갈량의 위나라 1차정벌을 맞아 잘 싸웠기 때문에 제갈량이 계교로 사로잡았다. 제갈량이 늘 곁에 두고 아끼며 자신의 병법을 물려 주었고, 제갈량의 사후 위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9차례 군사를 일으켰지만 촉나라 재정만 낭비시켰을 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답중(沓中)에 둔전(屯田)하던 중 위나라의 등애, 종회의 공격으로 촉이 멸망하자 종회한테 항복하고 뒷일을 도모하려 했지만 등애, 종회와 함께 죽으니 향년 59세였다.

이상이 강유에 대해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여기서 반드시 지적해야할 부분은 강유가 제갈량의 마음에 쏙 들어 그의 병법을 물려받을 후계자로 뽑힐 만큼 똑똑했었다는 점과(당시 그는 22세의 청년이었다), 제갈량 사후 10여년간은 국내의 안정을 도모했던 장완과 비위에 밀려 가만히 지냈으나 장완과 비위가 죽은 뒤 14년간 9번 위를 정벌하기 위해 기산으로 나아갔다는 점이다.

제갈량은 왜 강유를 후계자로 선택했는가?

먼저, 제갈량이 하필 위나라의 항장(降將)인 강유를 후계자로 선택해야했는지를 알아보자. 당시 촉한에는 문신으로는 장완, 비위, 초주, 곽유지, 동윤, 비시 등이 있었으나 제갈량은 이들의 능력을 높이 사면서도 군사(軍師)로는 중용하지 않았다. 위연이나 조운, 관흥, 장포 등은 지략이 없는 장수이므로 제껴두자. 나름대로 지략과 무용을 겸비한 마속, 왕평, 양의 등은 제갈량이 능력이 모자란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가정의 싸움에서 크게 패한 마속은 제갈량이 울면서 처형했다지만, 이미 강유를 얻은 다음이었다).

지략과 무용을 겸비했으면서도 마속이나 왕평 등과는 격이 다른 강유가 항복했을 때 제갈량은 크게 기뻐하며 "내가 남양 초당에서 나온 이래 두루 어진 이를 구해 평생 배운 바를 전하려 했으나 사람을 얻지 못하다가 이제 백약을 얻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강유는 (소설에서 미화된 점을 고려하더라도) 제갈량의 첫 북진에서 아무리 칠십이 넘었다지만 다섯 장수를 베며 사기가 충천해있던 조자룡과 대등한 싸움을 벌였고, 뒤에 등애에게 쫓길 때는 뒤에서 상대방이 쏴올린 화살을 되잡아 상대방에게 쏘아붙여 죽이는 신궁의 묘기까지 보여줄 정도로 무예가 뛰어났으며, 항복하기 전 제갈량의 계략을 간파하고 천수성을 지켜내는 지략도 갖추고 있었다. 이렇게 뛰어난 강유를 제갈량이 후계자로 삼은 것은 뭐 당연하다 할 수 있겠지만, 제갈량 자신은 무술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문신(文臣)이며 백면서생인데도 불구하고 왜 자신의 후계자를 굳이 무신(武臣)으로 골랐느냐는 점이 조금 의아하다.

제갈량의 추천으로 형주에서 등용되어 나중에 익주까지 따라온 장완, 비위 등은 제갈량이 죽으면서 나라의 뒷일을 맡길 정도로 뛰어난 문신들이었다. 두 사람은 연이어 촉의 승상을 맡아 촉의 재정을 탄탄히 하여 제갈량이 죽은 뒤로도 촉을 30년이나 지탱했지만, 두 사람이 죽은 뒤 강유의 위정벌, 그리고 환관들의 농락으로 재정이 바닥나 촉은 멸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장완과 비위는 지나치게 안정적인 정책을 취했고 두 사람의 틈에 끼어 강유는 십여년을 찍 소리도 못하고 군사만 키우고 있었다. 과연 제갈량이 원했던 것은 장완과 비위처럼 촉을 지탱하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강유처럼 위나라를 치고 나가는 것이었을까?

내가 보기에는 제갈량은 병법은 강유에게 물려주어 군권을 맡기고, 내정은 장완과 비위에게 부탁해 세 사람이 적절히 화합하여 위나라를 칠만한 국력을 키워주길 바랬던 것 같은데, 세 사람이 서로 화합하지 못한 것이 큰 잘못이었다. 어차피 촉한이 자리한 익주땅은 지키기 쉬운 곳이므로, 장완과 비위의 안정책은 일견 옳은 듯이 보이지만 제갈량이 원했던 것은 유씨(劉氏)의 중원 회복이지 촉한의 부흥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강유처럼 몰아붙이기만 해서야 작은 나라인 촉이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세 사람 개개인이 모두 제갈량만 못하다고 보았을 때, 세 사람이 모두 힘을 합쳐서 위에 맞서 싸워도 시원찮을 판에 세 사람 모두 따로 놀았던 것이다.

강유는 왜 무모한 전쟁을 잇달아 일으켰는가?

제갈량이 죽은 후 촉이 버틴 29년은, 장완과 비위가 전권을 쥐고 미동도 하지 않았던 전반부의 15년과 강유가 9번이나 위를 정벌한 후반부의 14년으로 나뉜다. 강유가 초반에는 장완이나 비위에게 짬밥도 밀리고, 벼슬도 낮아 쥐죽은 듯이 있었지만 위장군이 되고 연륜도 쌓이자 과감하게 위를 정벌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보통 강유의 9차례 위정벌은 촉의 국력을 깎아먹고, 결국 촉의 멸망을 불렀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과연 그런 것일까?

제갈량이 처음 위를 정벌하기 위해 기산에 나간 것은 서기 227년이었다.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죽은 것은 서기 234년인데, 7년 사이에 기산에 여섯 번이나 나갔다는 것은 강유의 14년간 9번과 비교해서 훨씬 잦은 빈도이다. 중원을 회복하겠다는 열정에 있어서 제갈량이 강유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는 않았다는 하나의 증거가 될 수 있다.

한실 중흥을 위해 중원 회복에 열을 올렸던 제갈량. 그러나 자신이 죽은 후 촉의 현실로 중원을 회복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사실 자신의 나섰을 때도 중원 회복은 물건너가있는 상태였지만). 그렇기 때문에 장완과 비위, 강유라는 삼각편대를 형성해놓았지만 세 사람의 고집 때문에 촉은 결국 멸망했던 것이다. 처음 장완과 비위가 연달아 정권을 쥐었을 때는 강유의 중원 정벌 욕구를 지나치게 억눌렀고, 억눌렸던 강유가 폭발했을 때는 내정을 보살피고 강유를 견제할 장완과 비위가 없었다. 장완과 비위가 제갈량처럼 내정을 전담할 후계자를 키우지 못한 점이 더욱 안타깝다. 어쨌든 강유는 제갈량의 유지를 받든다는 외고집으로 중원을 여러 차례 공격했지만 불안한 내정을 뒤에 업고서 전쟁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이것이 강유의 실패이며, 또한 후계자를 키우지 못한 장완과 비위의 실패이고, 제갈량의 실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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